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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24. 2021

여전히 '수레바퀴 아래서'


 나이가 들면서 성능이 좋아지는 것은 머릿속 지우개 밖에 없는지 외워도 외워도 며칠 뒤엔 다 지워져 있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아진다. 눈이 침침해지거나 허리가 아파 책상에 앉고 싶어도 오래 앉아있기 힘들어지니, 앉아서 공부만 해도 되는 아이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너희들은 좋겠다, 앉아서 공부만 하면 돼서'라고 농담으로 말하면 정말 나를 잡아먹을 듯이 진심으로 야유를 보낸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 공부하기를 다짐하는 아이는 많이 보아 왔지만 공부를 좋아하고 즐기는 아이는 많이 보지 못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다 잊는다는 말이 딱 맞다. 나 역시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성적을 올리려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무언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였기에 참아야 하는 것, 이겨내야 하는 것,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었다.


 나의 업무 역시 모르는 것을 알기 쉽게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공부를 억지로 시켜야 하는 게 주가 되었다.  왜 하는지도 모르거나 하기 싫어 몸을 비트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실랑이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 10배는 더 지치는 일이다. '공부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좋은 선생의 자질 아냐?' 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고 고개가 숙여지지만 사교육에 발 담근 지 20년이 다 되어가다 보니 그런 이상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현아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영어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어학원을 보내달라 했다. 공부량과 숙제량이 많기로 악명 높은, 엄마들만 선호하는 학원이었다. 스스로 공부를 하겠다고 학원으로 보내달라는 아이라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러나 매번 숙제에 치여 힘들어하며 짜증을 냈다. 투덜거리면서도 중학생이 되어 자연스레 그만두게 될 때까지 하며 꾸준히 다녔다.


 중학교 2학년,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되자 어른도 아이도 조급함이 생겼다. 하고 싶은 것을 잘 생각해보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도저히 잘 모르겠다고 했다. 현아는 중국어와 보컬학원 중 고민하다가 중국어를 택했다. 아무래도 미래를 대비하기에는 중국어가 낫겠다고. 무엇이든 배워보겠다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러나 얼마 안가 재미가 없고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그럼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 했더니 지금껏 배운 게 아까워서 안된단다. 한두 달 이마에 한 일 자 주름을 그리며 출근도장을 찍더니 결국 그만두었다.


무언가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 막연한 불안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정말 좋아해서 시작하는 일이라 착각하며 벌인 일들이 나 역시 너무나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좋아하거나 즐길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안에서 고르려 했다. 그게 훨씬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 보였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아야 하는 곳이라 믿었다.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숙제를 내주고 해오지 않으면 잔소리를 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였다. '저 애는 가르치기가 얼마나 편한지 참 착하고 좋다.' 성적으로 성격을 평가하는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하는 친구를 은근히 무시한다. 뒤쳐지면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자기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욕심까지.


 학원은 다 다니니까 다녀야 하는 곳이다. 모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는 학생은 많지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 소외됨에 대한 불안, 뒤쳐짐에 대한 불안, 그런 것들을 학원을 다닌다는 행위로 잠재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아우성에 가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는 것은 어른들이라고 뭐 크게 다를까. 낙오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걸까.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의 안녕을 얼마나 희생시키고 있는가. 시간이 아깝다며 동영상 강의를 보며 편의점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는 아이들의 본다. 열심히 산다는 건 불안을 잠재우는 정신안정제를 복용하는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독된지도 모르고 목적지 없는 인생길을 평생, 헐떡이는 개처럼 달려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울분 p23


필립 로스의 '울분'에서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말이 정답이라면,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야 덜 억울할 텐데. 아이들은 보고 배운 대로 이제 아버지의 말을 자신의 정답처럼 여긴다. 살아간다는 건 정답 없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정답을 정답인 듯 알려주는 학원에 다니는 것이 힘들지, 정답 없는 문제를 스스로 푸는 것이 힘들지 여전히 모르겠다. 나 역시 생각을 비우고 차 한 잔 마시는 여유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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