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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22. 2021

아빠, 멀고도 가까운


“아니 도대체 너희 아빠는 뭐 하나 부탁하려면 어찌나 힘든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려한데이. 사놓은 쌀 제자리 옮겨놓는데 하루가 걸렸다아이가.”

“아빠는 목소리가 왜 그리 큰지 밖에서 쪽팔려 죽는 줄 알았어. 누가 들으면 싸운다 하지 않겠나. 제발 밖에서는 좀 조용히 말하면 좋을 텐데.”

“친구들한테 하듯 가족들도 좀 다정하게 챙기면 좋겠다. 맨날 심심한 엄마는 나 몰라라 하고 너무 친구들하고만 놀러 다니시는 것 같아.”

“그래도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없데이. 사람이 진실되고 성실해서 평생 딴짓 한 번 안 하고.”

“그래, 좀 화난 듯 말하지만 틀린 말 하는 법은 없지.”

“큰 일 있으면 아빠 잔소리가 무서워도 제일 먼저 찾게 되긴 하더라.”


 여자 셋이 모이면 아빠는 공공의 적이 된다. 매일 만나는 여자 셋의 대화에 아빠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수다는 물 가득 탄 커피처럼 맹숭맹숭하지 않았을까. 마무리 대사도 매번 비슷하다. 이렇게 훈훈하게 끝내지 않으면 억울한 누명을 씌운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해지니 말이다. 아빠는 게으르고 성실하며, 옳은 말을 화난 듯이 하며, 살갑지 않아도 큰일에 든든한 모순투성이 개성적인 캐릭터다.


 아빠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척척 해결된다는 것을 안다. 얼마 전에도 아빠가 공부방에 다녀가신 후 미루고 미루던 뒤뜰 청소와 보일러실 정리를 단행했다. 나무 테크에 못을 손수 박으시고 전기 상태도 점검해 보신 후 '사람 드나드는 집에 안 보이는 곳이라고 지저분하게 해 두면 안 된다' 고 근엄한 대감마님처럼 지적하시고 가면 마음이 불편해 가만 있을 수가 없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뒤뜰 이끼와 낙엽까지 아빠 눈에 들어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게 하는 힘은 더 대단하다.


 나는 며칠 아빠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나의 실수로 나 대신 엄마가 아빠의 '버럭'소리를 들은 이후 마주치기 꺼려진다. 언니는 아빠의 버럭에도 그 은근한 애교나 겁 없는 바른 소리로 아빠를 제압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아빠 말이 옳든 그르든 마찰이 싫어 입을 꼭 다물고 피하는 쪽이다. 명백한 실수였고 반성하고 있는 일이라도 아빠가 그것을 들춰내면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아빠에게 물려받는 '욱' 기질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시골 가는 길에 '승희는 간다는 말도 없이 시골에 갔나 하시더라, 전화 한 통 해라' 엄마의 띄어쓰기 없는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며칠 아빠를 잘 피해 다니다 추석 용돈은 드려야겠다 싶어서 집에 내려갔는데 아빠가 등산가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일 저지른 나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가 아무 말도 없으셨다. 혹시나 그 일을 언급하실까 용돈 드리고 방으로 쏙 들어간 사이 아빠는 등산을 가셨다. 전화를 하니 호통 친 대감은 어디론가 가고 점잖은 선비로 돌아오셔서는 다녀오겠다는 인사에 흐뭇해하신다. 문자보고 1초도 안되어 전화를 걸게 하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우라가 아빠에게 있다.


 부드럽지도 달달하지도 않지만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과일, 사과. 하루에 하나씩 사과를 챙기는 아빠 덕에 우리 집에도 사과가 흔하다. 물컹하고 달콤한 과일에 밀려 인기가 없지만 한 번씩 사과를 깎아 한 입이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시원한 단맛은 일품이다. 각자 추석 연휴를 보내느라 며칠간 여자들의 수다에 공백이 생겼다. 흔한 사과를 깎아두고 이야기보따리를 펼쳐야겠다.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 특별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과일’이지만 없으면 아쉬울 사과 같은 사람에 대하여. 오늘도 아빠 귀 간지러움 주의보 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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