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그린 식민지 현실과 일본 3.11 후 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비극이 맞닿을 수 있을까?
재일조선인 학자, 도쿄 경제대학교 교수 서경식은 첫 문학 산문집 <시의 힘>에서 이러한 가능성 을 그려본다.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사상의 가장 본질적인 무기인 ‘글’과 ‘문학’에 맞닿고 있어 경계인으로서 살아온 서경식이란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소소한 악행에 가담하고 불안해하던 소 학교 학생 서경식에서부터, 첫 시집을 낸 고등학생 서경식, 오늘날 일본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 서경식에 이르기까지 시, 문학과 함께한 그의 인생의 기록이다.
그의 운명은 한반도를 휩쓴 근현대사의 시간이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에게서 출생한 서경식에게는 식민지 역사가 태생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서울로 유학 가 시대와 불화하던 서승, 서중식 두 형의 석방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던 그는, 석방 이후 디아스포라라는 경계인의 눈으로 정치, 사회, 문화, 예술에 관한 글을 써왔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쉽사리 희망과 타협하지 않고, 절망적이었음에도 그 누구보다 끝까지 몸을 끌고 간 이의 것이기에 마음으로 읽는 글이었다.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저자 서경식을 만나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인생, 동아시아의 역사,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글에서 받은 무겁고 진 지할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그는 지적인 언변 사이사이에 자상한 비유와 코믹한 농담도 잊지 않았다.
Q <시의 힘> 초반부는 중학생 시절 단편소설 습작기부터, 첫 조국과의 만남, 대학 시절, 1980년대 한국 군사독재 종료 후 ‘일본’을 현장 삼아 활동한 기록들이 문학적 회고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낸 첫 시집 <8월>의 시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유년시절 문학적인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살아오면서 다른 주제들에 관해 더 많이 쓰게 된 데에 이유가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 했어요. 일본말로 시를 쓰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었죠. 저에게 일본말은 식민지로 강제당한 남의 말, 지배하는 다수자들의 말인데, 소수자로서의 심정을 이것으로 표현, 소통하는 데 한계를 느꼈죠. 우연히 여러 계기로 글 쓰는 사람이 된 후 한일 관계, 재일 조선인과 같은 민족적 사회적 시사적 문제에 대해 필요 에 따라 쓰고, 한편에는 서양미술이나 서양음악 같은 문화적인 것에 대해 써왔지만, 시는 이후로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 가까이 되었을 때 형 둘이 출옥한 후 한국에 오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나마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시를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에요.
Q 식민지배 국가에 체류하며 그곳의 말을 써야만 했던 소수자로서 시를 쓸 수 없는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로 생활하고 문학도 일본어로 배웠기 때문에 일본어는 저의 모어입니다만 모국어는 아니에요.
가야트리 스피박은
“인도인에게 영어는 강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다. 영국 제국주의가 자신들을 강간했기 때문에 우리가 영어 를 쓰게 됐다.”라고 말한 바 있죠.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인도인들은 영어를 잘해서 좋겠다”라든가,
“영어를 쓰니 글로벌 IT 기업에서 일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죠. 그런데 사 실 그 배경에는 식민지의 역사가 숨어 있는 거예요. 재일 조선인에게 일본어의 존재도 이것과 마찬가지예요. 표현에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재일조선 인에겐 일본말도 강간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좋아해서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가져왔어요. 그래도 모어니까 버리거나 벗어날 수는 없어요. 주변에 모어를 바꾸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사람도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사는 장소나 생활환경을 전부 바꾸지 않는 한 그건 어려워요. 이 나이까지 일본에서 살아왔으니까 ‘기꺼이’는 아니지만 ‘승인’하고,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이 미묘한 착잡함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Q 너무 당연하게 모어와 모국어, 민족과 국가를 등가물로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민족이란 개념은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일 텐데요. 선 생님께서 생각하는 민족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민족은 하나의 본질이 아닌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인이라는 본질이 있어서 그 본질을 지닌 사람만 민족이고 아닌 사람은 민족이 아닌 건 아니라 생각해서, 소위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해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말도 서툴고. 일본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을 보고
“너는 더 이상 우리 겨레가 아니다”라고 얘기해요. 실제로 정치인
김종필이 한일 협정 때 일본을 방문해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재일조선인은 한국말을 상실하고, 일본인들처럼 살고 있으면서 왜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 주장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김종필이 사고하는 식의 민족주의에는 난 반대해요.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재일조선인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었으면 코리언 디아스포라로 해외 표류할 근거도 없죠. 이런 맥락을 읽어야 해요. 이 맥락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런 맥락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민족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Q 역사적 맥락을 두지 않고 단순히 ‘한국인’, ‘일본인’으로 표현하는 게 폭력적 방식일 수 있겠네요.
지난 3월 런던에서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어요. 현재 한일관계나 동아시아 국가 간 정세에 대해서 였는데, 기자가
“한국도 일 본과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에 빠지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국가는 어느 국가든 내셔널리스트예요. 하지만 나는
“양쪽 내셔널리즘을 비교해서 ‘나는 이쪽 편’이란 얘길 하고 싶진 않다”고 대답했어요. 덧붙여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독일-프랑스, 영국-프랑스와는 다르다. 오히려 독일-폴란드 영국 -아일랜드의 관계로 상상하라.”고
했어요. 폴란드인들이 “우리는 폴란드인이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독일 등 주변 국가로부터 침략받아왔기 때문이고, 아일랜드인들이 “우리는 아일리시”라고 할 때는 영국
크롬웰한테 너무 무참히 탄압받았 기 때문이니까요. 그럴 때 영국이나 독일 사람이 역사를 무시하면서 폴란드나 아일랜드인에게 너도 내셔널리스트 아니냐고 하는 것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레 토릭이 될 수가 있죠.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의 <고향> 중)
[...]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 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야기한다. 암흑을 이야기한다. (<시의 힘> 중에서)
Q 이번 책을 포함한 여러 기회를 통해 루쉰에게 많은 공감과 동질성을 표해 오셨습니다. 선 생님께 루쉰은 어떤 존재인가요?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고문사 했을 때, 루쉰이 보낸 편지에 대해 쓴 나카노 시게하루의 글을 루쉰에 관한 문장 가운데 제일 좋은 것으로 꼽으셨는데요.
루쉰 선생님께 직접 지도받은 적은 없지만 제게 은사 같은 존재지요. 동아시아에 루쉰이란 존재가 있기에 우리도 제대로 생각하고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고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예요.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공선>이란 작품을 쓴 후 치안유지법 때문에 구속당하고 고문당해 죽고 말았어요.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무렵임에도 루쉰 선생님이 거기(편지)서는 ‘동지’라는 말을 쓰면서 진심으로 조의를 표했어 요. 국가와 국가가 대립관계에 있을 때 우리 인민들은 어떻게 연대할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예요. 유화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과거는 과거로 해서 더 이상 묻 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야기와는 전혀 달라요. 정 반대예요. 국가는 그런 얘기를 하죠.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Q 책에서 루쉰의 태도와 비교해 일본을 ‘정작 일본인은 자국이 저지른 침략을, 마치 천재지변이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p.103)’라고 강력히 비판하셨습니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국민 중 천황제 희생자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 지는 나라예요. 지금껏 그런 체제가 지속하 여 왔고. 악화하고 있어요. 그 원인은 근대 국가 자체가 그 틀을 이용해 이익을 얻은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기 때문이지요. 국가 지배층이 시대별로 지주, 기업주로 바뀌면서 이들은 국민 대다수에 대해선 소수인데. 소수가 대다수를 지배하려면 폭력적이게 돼요. 폭력적으로 지배한 사례가 아까 말씀드린 치안유지 법이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의 유신체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국가 이데올로기 아래서는 지배받은 다수자 쪽에서 자신들이 폭력적으로 지배받으면서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게 돼요. 한쪽은 지배자이고 다른 쪽은 피지배자인데도 ’둘은 같은 국민’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죠. 일본이라 는 국가가 농민이나 노동자 같은 가난 사람들을 탄압하면서도 ‘침략전쟁에 이겨서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되었다’, ‘우리도 일등국민이 되 었다’고 해서 국가와 무의식적인 공범 관계를 만들고, 그렇게 국가가 유지되는 거예요.
Q <시의 힘>에서 루쉰과 고바야시 다키지와 같은 관계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단 얘길 하셨는데요.
고바야시 다키지는 결국 학살당했고, 루쉰 선생은 억울하게 죽고 말았어요. 루쉰 선생이 ‘피의 예감’이라는 말로 유서를 쓰고 세상을 떠난 1년 후에 중일 전쟁이 터졌어요. 60년대 일본 민주주의나 평화주의에 가담한 선생님들은 “조금만 참아라. 천황이 늙어서 죽을 것이 다. 이놈만 죽으면 일본 사회가 더 좋아질 거야.”라고 얘길 했어요.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더 나빠졌어요. 그래서 이렇게 단기적으로 보 면 과거도 지금도 비관적이죠. 그런데 낙관이라 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루쉰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고바야시 다키지가 있었다. 지금도 많진 않지만 잘 안 보이 지만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일 겁니다.
Q 루쉰의 말처럼 결국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 걸으니까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겠네요.
루쉰 선생님이 살아 계시던 게 20세기 초니까 이제 100년이 되었죠. 100년을 싸워왔는데 아직 이길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게 의미 없는 헛된 싸움이었는가 하 면 그게 아니죠. 왜냐하면, 나 같은 힘이 약하지만 뭔가를 해야겠다는 영감을 주지요. 그것이 희망이라 한다면 전부예요.
Q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라고 하셨는데요. 이와 같은 서정시의 본질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요?
우리 논리가 지배하는 로고스적인 세계에서는 이 행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입증해야 해요. 요즘 통계 수치를 내밀면서 ‘너 희가 아무리 그걸 하더라도 소용없다’라고 하잖아요. 인간에게는 그게 아닌 세계가 있단 말이에요.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더라도 “그래도 이 건 싫다”, “도저히 못 하겠다”, “이 방향으로 가고 싶다”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권력자나 지배자나 아버지나 교수 같은 사 람들은 비논리적인 방식이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요. 그럴 때 “그래도 난 이 길로 가겠다”는 태도는 입증 불가능해도 인간 삶에서 필수적인 서정시의 세계예요. 시라는 게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잘 되면 재미가 있지요? 예를 들어 “이 사람은 나”라 했을 때 듣는 사람이 “’ 이 사람은 나’라는 게 무슨 얘기지?”라고 의문을 가져 상상력을 개방하고 “왜 이 사람이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어떻게 비유가 되지?”라고 생각을 하지요? 이 사람이 실제 나라면 비유로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싸워선 이길 수 있다고 입증 못 해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 시적인 상상력의 세계예요. 그것이 서정시의 형태로의 저항이라 말할 수 있어요.
Q 서정시적인 상상력이 어떤 모습으로 현실에 등장할 수 있을까요?
일본 전후 대표적 지식인인 카토 슈이치 선생이 쓴 <양의 노래>라는 책을 보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 비아 대학에서 가르치던 시절에 학생들 사이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난 이야기가 있어요. 학생들의 움직임에 교수들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때 가장 먼저 일어서는 사람들은 문학 전공이고, 제일 마지막은 정치학자들이었대요. 이 사람들은 국가가 하는 전쟁 행위에 우리가 이 힘으로 저항 해도 도움이 될지를 입증하려고 하니까 안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시인이나 문학 하는 사람들은 “전쟁 공범자로 죽고 싶 지 않다”는, 말하자면 비합리적일 수 있는 동기로 일어서는 것이죠. 그것이 서정시적인 상상력이잖아요.
Q 시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일본에서는 요즘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시가 쓰여요. 자기중심적이고 사적인 좁은 세계지요. 그것으로 자기 위로만 하고 있어요 . 이런 시가 상상력을 개방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가령 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어떻게 하면 독창적이고 나만 할 수 있는 표현으로 할 수 있을지를 고 민해야 시가 되죠. 디에고 리베라가 프리다 칼로와 사랑에 빠졌을 때 러브레터를 어떻게 썼는 지 알고 계세요? 프리다 칼로가 원주민 혈통이어서 눈썹이 일자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디에고 리베라가 ‘새까만 새가 날개를 연 것처럼 보이는 그 눈썹’이라는 비유를 적어 편지를 보냈어요. 이런 게 바로 시죠. 물론 상대방도 그걸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있어야 하겠죠. 디에고 리베라가 그런 러브레 터를 보냈을 때 프리다 칼로가 “새까만 새?”하고 이해 못 하는 반응이었다면 곤란하겠죠.(웃음)
Q 한 강연에서 “우경화와 반제국주의에 맞서는 방법으로 정치투쟁에 앞서 교양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노동투쟁이나 정치투쟁을 부정하는 건 아니며 그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 세대에게 직설적으로 투쟁하라고 얘기하기 전에 바탕이 되는 교양, 기초 자체를 알아야 소통할 수 있어요. 교양이 없으면 이것이 옳다고 직선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되거든요. 예를 들어 <시의 힘>에서 후쿠시마 원 전 사고를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비유로 들어 얘기했죠. 일본밖에 모르던 사람에게도 그런 비유를 든다면 일본의 과거 식민지 지배가 조선 민족에게 가져온 슬픔에 대해서 상상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비유예요. 비유하는 능력은 현시대를 살피는 수평적 관점도 필요하고. 과 거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시야도 필요하지요. 그런데 좀 경직된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엄밀치 않다던가 하는 식으로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시적인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라고 저는 생각하고, 이때 필요한 게 교양이에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9월 5일과 6일 인천에서 ‘다큐 영화제’가 열려요. 그때 내가 출연한 NHK 제작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데, 디아스포라에 대해 강연도 하고, 다큐 멘터리 제작한 감독과 대화 시간도 가질 거예요. 9월 하순에는 한남대에서 특강이 있고요. 대학에서 저는 예술학과 인권론을 동시에 강의하는 이상한 교수예요. 제겐 인권과 예술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에요.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미술 작가 잉카 쇼니바레 얘기를 통해 접근할 수 있듯 말이죠. 예술적 관심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상상력을 개방시키는 수업을 계속할 거예요.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 북DB 2015.7.29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0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