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응급실을 가다.

0.02 퍼센트의 삶 두 번째

by 하트맨

((이전 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2019년 6월 1일, 유독 하늘이 맑았던 그날 난생처음 응급실을 갔다.

건강검진 상담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이 추천해준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을 가기 전에 집에 돌아와 짐을 꾸렸다. 금방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담요와 세면도구 따위를 가방에 넣었다. 토요일임에도 일을 하고 계시던 아빠는,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셨다.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는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부모님께 심폐소생술을 알려드리는 것이었다. 집에 있던 베개를 가지고 심폐소생술을 알려드리면서, 순간 쓰러진 나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절박하고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그런 일이 없을 거라며 안심시키면서도, 만에 하나 정말 내가 쓰러지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하실까 봐 걱정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매년 초 체력측정을 하는 기간이 있었다. 유연성, 악력 등을 측정하는 것 이외에도 운동장을 8바퀴 정도 뛰어야 했다. 운동부나 축구를 잘하던 아이들이 경주마처럼 순위 경쟁을 하는 동안, 조금만 뛰어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조금 뛰고 많이 걸었다. 그렇기에 항상 꼴등이거나 뒤에서 2등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체력측정 기간이 정말 몸 서리치게 싫었다. 단순히 운동을 하지 않아서 체력이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빨리 걷는 사람을 뒤따라 걸으며 숨이 찼던 날들, 남들보다 유난히 느렸던 걸음 하나하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만 내가 알지 못했었을 뿐. 건강검진 결과를 아직 듣지 못했을 그 당시는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많은 과제들을 해야만 했었다. 나는 아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쏟아지는 잠을 참기 위해 커피와 고카페인 음료를 달고살며 공부를 했다. 건강을 담보로 한 일종의 도박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시간이 부족해 휴식은 점차 뒤로 미뤄졌고 피로는 점점 쌓여갔다. 한달내내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나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게다가 입에는 잇병까지 나 음식을 씹을 때마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과 함께 기침이 나기 시작했고 학교 앞 편의점에서 팔던 감기약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근처 내과에 갔을때는 감기증상이라고 했는데, 그 다음날 나는 희귀 난치병과 심낭염을 진단받았다.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찾은 것 같았다.



오늘따라 안전벨트가 몸을 조이는 것처럼 유독 갑갑하게 느껴질때쯤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을 떠올리면 환자가 의식 없이, 피를 흘리며 급박하게 들어오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발로 걸어들어오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간호사 선생님들이 들어와 말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봤었는데, 간호학과에 입학해 실습 연습을 하며 셀 수 없이 되풀이했었던, 이 말을 내가 듣게 될 줄이야, 내가 환자가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환자복을 갈아입은 나의 가슴에는 하나둘씩 온갖 장비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양쪽 팔과 왼쪽 손목에서 피를 빼갔고, 손가락에는 산소포화도를 측정하는 장치가 붙여졌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손에 뭐 바른 거예요?"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들을 정도로 양손에는 땀이 흥건해졌다. 땀을 닦아낸 내 손에는 환자 번호가 찍힌 팔찌가 채워졌다. 검사실로 이동할 때 부착된 장비가 많아 침대에 누운 채 이동해야만 했다. 응급실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검사를 하고, 곧 순환기 내과 당직 선생님이 내려왔다. 또다시 초음파 검사가 이루어졌다. 하루 동안 세 번 초음파 검사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임산부도 하루에 세 번은 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검사기에 바른 젤은 차가웠으나, 아까와는 다르게 나를 지켜보는 사람은 늘어났다.


정체모를 기계소리와 기침소리를 들으며 독감 검사와 혈액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커튼 너머로 마스크를 쓴 채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동기들의 몇 년 뒤 모습은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과연 그 모습들을 볼 수 있을까, 그때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조금은 우울한 생각도 들었다. 응급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올 수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들어오셨고, 어느 순간 들어온 엄마의 눈은 다소 붉어져 있었다. 나는 왜 그런지 물어보지 않았다.


기다리던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당장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지속적으로 병원을 다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후성 심근증이 있던 상태에 심낭염이 생겼고, 물이 차있다고 했다. 수술이나 시술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병원을 오면서도, 결과를 기다리며 건강검진 결과가 잘 못된 걸 수도 있을 거라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른 의사 선생님의 입으로 다시 한번 들으니 이제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 외래 진료와 검사를 하기로 예약하는 순간, 검사시간과 수업시간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수업시간이 먼저 생각났다는 것이 우스웠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했다.


병원 지하 약국에서 약 다발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내가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죽음'하면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따사로운 햇볕이 들어오는 병실에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고, 원하는 모습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 보내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학에 입학한 스무살 새내기도, 세 살짜리 아이도, 그리고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들까지 누구나 죽을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허둥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기에 불안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하루를 더 소중하게, 값진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출발하기 전 준비했던 세면 가방을 여는 일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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