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치의 LA 3부작
LA, 혹은 할리우드는 꿈의 공간이다. <카사블랑카>의 창문부터 <라라랜드>의 일몰까지, 낭만적인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며 여전히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영화 속에서 도시는 신나게 부서지거나, 건물 사이로 쫓고 쫓기는 미로가 되어주고, 인물들이 춤추며 사랑의 말을 건네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다음 영화에서 다시 단장한 모습으로 관객을 마주하여 환상을 이어간다.
반면 겹쳐진 욕망으로 혼란스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공한 배우는 전체의 0.05%에 불과하고, 남은 작은 자리를 놓고 대부분의 무명 배우들이 경쟁해야 한다. 욕망이 넘쳐버린 결과로, 로만 폴란스키부터 하비 와인스틴까지 걸출한 감독 및 제작자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의 가해자로 밝혀지는 곳이다. 길거리는 깨끗하지만, 닫힌 건물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LA가 가진 두 특징을 섞어 도시와 영화를 소재로 세 이야기를 만들었다.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야망과 좌절을 다루되, 감독의 방식대로 서사를 혼란스럽게 엮어 놓았으며 환상 속에 빠져있는 듯한 서사 속에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까지 담아내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영화가 제작되기 전, <인랜드 엠파이어>(2006)는 영화가 제작되는 중, <로스트 하이웨이>(1997)는 영화가 제작된 이후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하지만 이 경계는 절대적이지 않아서, 제작 과정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상영되고 있기도 하고, 배우와 관객이 접하며, 서사가 순환되어 영화의 시점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전반부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과정이 감독과 배우의 입장으로 그려진다. 저명한 영화감독 아담 케셔는 카밀라 로즈라는 생소한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라고 요구받는다. 요구를 거절한 그는 제작자의 차를 부수며 당당하게 자리를 뜨지만, 이후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파산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는 등 연쇄적인 불행으로 좌절하던 감독은 오디션장에 나타난 어색한 연기의 카밀라 로즈를 캐스팅한 이후에서야 영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무명 배우 베티는 할리우드에 도착해서 가진 첫 오디션에서 중견 배우의 과도한 접촉을 당한다.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은 그가 맡은 역할과 사랑에 빠지는 연기였지만, 사욕이 섞인 그의 연기는 사전 합의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 잠시의 고민 이후 그녀는 그의 접촉까지 연기의 일부로써 수용하여 장면을 마친다. 이는 자리에 모인 모두로부터 박수받는 장면으로 남아 그녀가 역할을 차지하게 한다.
카밀라 로즈의 오디션을 베티가 지켜보기 전까지, 두 이야기는 교차되지 않고 별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순간도 베티가 친구의 약속에 늦었다며 자리를 뜨며 대화 없이 끝난다. 경험 적은 무명 배우라는 같은 위치에서 베티는 불쾌함을 감수해가며 자신의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해야 배역을 얻을 수 있었지만, 카밀라는 꾸며진 모습 위의 미숙한 노래만으로도 더 좋은 배역을 얻는다. 감독과의 인사를 거절하고 자리를 떠나는 베티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위에서의 욕망과 간택으로 결정되는 현실에 대한 작은 저항의 표현으로 보인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상하 관계에서의 위력 행사로 벌어지는 충돌을 그린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 제작 중 배우, 각본, 관객 간의 접촉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그린다. 성공한 배우 니키 그레이스는 차기작을 <슬픈 내일의 환희>로 선택한다. 하지만 낯선 이웃이 그녀에게 잔혹한 복수를 경고하거나 첫 대본 리딩 현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등 꺼림칙한 일이 발생하고, 배역 결정의 이유가 되었던 각본의 저주 이야기를 듣는다. 해당 각본은 예전에 제작에 들어갔었지만, 주연 배우 둘이 모두 비참하게 살해당해 제작이 취소된 것이었다. 니키는 이후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리나 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불륜 관계를 가지는 연인 역의 데본과 밀회하며 이야기에 귀속되기도 한다.
저주받은 대본은 공포 영화의 소재로써 친숙한 설정이지만, 이후 영화에서 유발되는 혼란은 <슬픈 내일의 환희> 제작 안팎을 오가며 발생한다. 니키와 데본의 투샷이 연기와 현실을 걸쳐 이어지며 새로운 장면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혼란을 주기도 하고, 니키가 골목을 다니다 낯선 이에게 칼을 맞아 죽는 시점에서 영화 속 감독의 컷 사인이 나오며 현실로 벗어나기도 한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 어떤 장면이든 영화 속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장면을 더욱 뒤튼다. 그렇게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충돌하고, 그 안에서도 장면은 감독의 사인과 함께 마무리되며 영화 속 영화가 아직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과 <인랜드 엠파이어>의 상영도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 모두를 상기시킨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제작을 마친 영화, 나아가 모든 영상이 관람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한다. 처음에는 짧은 영상이 작은 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군가가 집의 외관을 촬영한 DVD가 배송되어,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프레디 매디슨과 그의 아내 르네를 동요시킨다. 이어 영상은 확장되어 두 사람이 침대에 있는 모습을 담고, 부부는 경찰을 불러 촬영 방식을 알아내려 하지만 실패한다. 정지되지 못한 자극성의 추구는 더 강한 자극과 혼란을 유발하여, 잘린 어느 기억 뒤에 프레디 매디슨은 살해당한 아내 옆에서 발견되어 체포된다.
점차 길어지는 <로스트 하이웨이> 속 영상은 등장인물이 직접 촬영에 참여한, 영화의 단계에 가장 가까워진 영상으로 완성된다. 도피를 시작한 프레디와 르네, 혹은 피터와 앨리스는 별장에 도착해 앨리스가 촬영된 성인물의 상영을 마주한다. 자신의 나신이 나옴에도 훔칠 물건만 찾는 앨리스 뒤로, 프레디 매디슨은 상영되는 영상의 제작자를 살해한다. 점차 도덕성을 잃은 프레디는 마침내 모든 영상을 촬영한 카메라를 든 남자를 만났음에도 그에게 보복하는 대신 그와 같은 편에서 서서 두 번째 살해를 저지른다. 변화하는 인물의 모습은 갈수록 자극적인 내용으로 향하는 영상, 혹은 영화는 더 큰 폭력만 낳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줄거리만으로도 세 이야기 모두 혼란스럽지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그 이야기를 한 번 더 꼬아서 제시한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는 현실의 니키와 데본과 그들이 연기하는 배역이 혼동되고, <로스트 하이웨이>의 프레디 매디슨과 르네는 어느 순간 피터와 앨리스로 변했다가 다시 프레디 매디슨으로 돌아온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갓 할리우드에 도착한 베티의 이야기에서 할리우드에서 실패한 다이앤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인물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하는 영화의 특성을 활용해 이루어진다. 관객은 그들의 이름이 불리기 전에는 하나의 배우가 1인 2역을 하는 것인지, 두 인물이 같은 존재인지, 혹은 하나가 다른 한쪽의 환상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혼란 속에서 그들의 꿈이자 현실인 무언가를 관람할 뿐이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후반부이다. 베티가 파란 상자를 연 시점을 분기로 하여 그 이전의 전반부는 기억을 잃은 여인이 베티에게 찾아오고, 그녀의 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 끝에 상자를 발견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반면 열린 파란 상자는 베티가 다이앤으로 불리는 다른 현실 혹은 꿈을 보여준다. 성공한 배우 카밀라의 연인이었지만 직업적으로는 실패했던 배우 다이앤은 자신의 연인이 아담 케셔와 사랑에 빠지자 충격으로 약물에 중독된다. 약물이 준 환상 속에서 다이앤은 자신이 꿈을 꾸기 시작했던 처음 모습인 베티로 치환하고, 연인 카밀라는 기억을 잃어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카밀라라는 이름은 능력 없이 연줄로만 버티는 배우에게 넘긴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각자 서로를 환상처럼 묘사하며 꿈과 현실을 구분하면서 연결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아예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회귀하여 처음으로 돌아간다. 도시가 새로운 영화에서 다시 단장한 모습으로 등장하듯, 초반부로 다시 연결되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계속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차에서의 장면이 대구를 이루고, <인랜드 엠파이어>는 혼란에 빠진 채 복도를 따라간 결과 첫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로스트 하이웨이>의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세 영화처럼, 혼란과 꿈의 도시 LA 역시 여전히 꿈과 욕망과 혼란을 간직한 채로 계속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