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다 똑같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이 제목을 보고, 많은 인문 학자들이 인간이 분명 '사회적 동물'임을 입증할 자료를 가지고 달려올지 모른다. 인류가 오랫동안 확신해 온 보편적 명제를 감히 건드리는 자 누구인가. 글 내용 별 거 아니기만 해 봐라 잘근잘근 씹어줄 테니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의 무게
이 명제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이것 때문에 우리 모두 너무 조바심이 들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많은 사람들과의 이해관계 속에서 치고 빠지고 적당히 어울리고 인간관계 덕을 보며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괴로워지는 이유, 결핍감을 부추기는 이유가 된 건 아닐까.
자녀 출산으로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주부
몸이 불편해서 어떤 모임에도 나갈 수 없는 노인, 장애인
언어문화 장벽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이민자
위에 열거한 사람들도 자신만의 '작은 사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 몇 명, 혹은 친구 몇 명이 다 일지라도 말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사회' 몇 명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것을 '사회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가리키는 듯한 '사회' 안에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억지 사회'를 만들고자, '억지 소속감'을 느끼고자 맞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그들과 잘 지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은 그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금방 사회 밖으로 튕겨져 나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간관계' 경험이다.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사교성에 대한 압박 때문에 많은 내향성을 가진 사람들은 외향성을 키워갈 것을 어릴 때부터 닦달당해왔다.
사람이 싹싹해야지! 둥글둥글해야지!
외향성은 '대인관계 지능'과 연결되는 에너지가 밖으로 뻗어나가는 성향으로, 사람이 좋고 사람이 궁금하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무슨 일이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사람들을 항상 곁에 두려고 하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얻는 성향이다. 내향성은 '개인 이해 지능과 연결되는' 에너지가 자신의 안으로 파고드는 성향으로 혼자 조용히 연구하거나 사색에 몰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성향이다.
외향성 강한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부터 사람들과 눈 맞추고 교류하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먼저 다가갈 줄 안다. 마치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처럼 이리저리 사람 마음에 나풀나풀 쉽게 다가가 어느새 사교의 중심 자리에 앉아있다.
그런 성향은 그런 성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노력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성격이라고 기준으로 정해 버리면, 여러 많은 다른 장점들을 가진 성향들은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행복한 사람들도 많다. 고독과 은둔 속에서 가장 큰 역량을 발휘하는 예술가 작가 학자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겐 너무 크고 복잡한 사회는 에너지만 뺏어가는 부담일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부담, 사회적 동물을 키워야 하는 부모의 부담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받는 요즘. 학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교 가는 건 공동체 안에서 사회생활 연습하는 의미가 큰데,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확실히 외향적인 아이들은 친구를 못 봐서 답답해 죽겠다고들 한다. 반면 내향성이 강한 아이들, 혹은 어떤 이유로든 다른 아이들과 내가 좀 다르다고, 어울리기 힘들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괴롭히는 아이도 없고,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입장에 처할까 봐 바짝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항상 내 편인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들 한다.
누구를 위한 공동체, 누구를 위한 사회인가!
교사들은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며, 스스럼없이 발표 잘하고, 말 잘하고 모두와 잘 어울리는 수줍음 없는 씩씩한 아이들을 '모범'생으로 기준을 잡아 왔다. 너무 한쪽 성향의 사람들 위주로 디자인된 교육 시스템은 아니었을까. 100년 전 디자인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구식 교육 시스템을 '코로나'가 날려 준 것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성향의 다양하게 독특한 아이들이 '사회적인 동물 키우기' 시스템 - 비슷한 성향과 사고방식의 아이들로 찍어내려고 하는 성향이 다분한 - 의 이면에서 고통당하고 있었던 것을 이제는 제대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모든 아이가 '안전함',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갖출 때가 되었다.
몰려다닐 아이들, 항상 함께 있는 친구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학부모들은 자녀가 아주 어릴 때무터 그런 2-3명의 친구 그룹을 만들어 주려고 엄청난 물밑작업을 한다. 주말마다 그 부모까지 초대해서 비위를 맞추고 함께 갈 동맹 관계를 확고히 다지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모습은 '상견례'자리 저리 가라다. 원했던 대로 어른들 동맹이 낳은 아이들의 그룹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몰려다니며 그 그룹 안에 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외롭게 하고 서럽게 한다. 때론 여럿의 힘을 자각하면서 더한 괴롭힘도 감행하는 '선'을 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제 그런 악순환을 만드는 노력, 그런 분위기에 맞추는 장단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내가 사회 속에 속하려고 애써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 - 특히 스스로 사회를 형성하고 찾아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회'가 되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느리고 작고 약한 사회'도 충분하다고 격려하고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거의 정확히 반반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내 성격은 누군가에겐 외향적으로 보이고 누군가에겐 내향적으로 보인다. 강하게 외향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내향적이지도 않아, 외향성의 장점도 내향성의 장점도 결여된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양쪽의 심정을 잘 아는 양향성이 주변 사람을 이해하는데,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으리라 믿으며 내 성격을 사랑하고자 한다.
나보다 외향성이 강한 사람들에겐 내가 필요 없다. 그들은 내가 아니어도 스스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한다. 나는 그래서 나보다 내향적인 사람들 곁에 머무르려고 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 많은 경우 그들이 억지로 나왔을 - 에서 나는 가장 내향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옆에 있으려고 한다. 군중 속에서 피하기 힘든 '원하지 않는 고독'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라고.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고 싶은 심리적 욕구를 가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조용하고 집에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아주 가끔 만나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소통하는 사회를 만들게 되는 편이다. 나는 그런 '매우 느린 속도의 작은 사회'가 부담이 없고 마음에 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어느 정도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명제 일지 모르지만,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덮어줄 수 있는 '충분한 명제', 요즘 시대에도 무조건 보편적 진리로 간주해야 할 '당연한 명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섬세하게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발전이 필요한 명제다.
시비를 걸고 싶었으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라고 제목에 내 비뚤어진 마음을 과장되게 담았지만, 내 본심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들여다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편안히 덮어주는 진리를 추구해 가자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