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곳에서
"이 정도면 어때요, 충분히 높아요? 이 건물은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타워예요. 여긴 최고층은 아니고, 우리 머리 위로 4층 더 있어요."
순간, 나는 혹시 오는 길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천국에서나 펼쳐질 것 같은 럭셔리. 럭셔리 중의 럭셔리.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친 럭셔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끓어오르는 극도의 낯선 이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극을 해야 할 때 자신의 쉽게 위축되는 본성을 누르기 위해 '다 좁밥이야' 생각을 한다는 어느 개그우먼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그 개그우먼의 노하우가 나에게도 필요하다. 다 사람 사는 데야. 인간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 봤자, 집인데. 밥 먹고 똥 싸고 누워 자는 것 밖에 더 하겠어. 다 좁밥이야.
마음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방금 전 초명품 바이크 맛을 그대로 느낀, 모두가 좁밥인 걸 이해 못하는 다리가 달달 떨려왔다. 표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꾸 무언가가 숨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보다 현실적인 공간, 모두가 똥을 싸는 공간 같은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 화장실 좀..."
내가 말을 뱉자마자, 아난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에 뜬 이름을 보는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날 위해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창한 힌디어로 전화를 받았다. 힌디어를 말하는 아난트는 또 다른 사람 같다고 느끼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아... 씨ㅂ..."
화장실은 더 미쳤다. 감당하기 힘든 공간의 압력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들었건만, 화장실은 화장실대로 금으로 사방을 바르고 각종 보석을 화장실에 붙여 숨겨두기로 한 듯 번쩍거리기가 보물섬 보석 동굴이 이런 느낌일까 싶다. 나는 일단 물을 틀어 평범한 물소리에 의지하며, 숨을 몰아 쉬었다.
'아무나 높은 데 올라오는 게 아니네. 이런 공간을 감당할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게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들자, 창백한 얼굴의 동양 여자가 앞에서 난감한 것도 같고 비루한 것도 같은 희미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화장을 고치려고 가방을 찾다가, 바이크 트렁크 안에서 가방을 꺼내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너무 생소한 환경으로 진입하여 정신이 나간 것이다. '정신 차리자!' 나는 차가운 손바닥을 볼에 대고 탁탁 두드린 후, 모자를 벗고, 머리 밑에 손가락을 넣어 머리카락을 부풀리며 매만졌다.
화장실에서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가니, 아난트의 부름을 받은 누군가가 갈색 가방을 갖다 놓고, 그 뒤를 이어 누군가 호텔 룸서비스에나 사용될 법한 음식 카트를 끌고 들어온다. 아난트가 힌디어로 지시하자, 각기 다른 목적으로 온 듯한 두 사람이 함께 창가에 있던 데이베드와 화분들을 들어 카우치 옆 공간에 밀어붙이고, 다이닝 룸의 식탁 테이블을 힘겹게 들고 와 데이베드가 있던 창가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러고 나서 카트 위 음식과 음료수들을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두 사람은 뭐 더 시킬 건 없는지 민첩한 태도로 아난트의 눈치를 살핀다. 아난트가 이제 됐다는 듯한 손짓을 하자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문이 찰칵 잠기는 소리를 낸다.
"여기 와 봐요. 정말 높다는 걸 느낄 거예요."
"그러네. 정말 높다."
"아까 온 전화 어머니였어요."
그가 내뱉은 '마더'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당황스러운 감정들을 느끼며, 처음에 물어봤야 했을 걸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근데, 여기가 어디야? 혹시 너희 집이야?"
"이 건물 전체가 우리 집안 건물이에요. 말해줬잖아요.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아...!"
첫날 스타벅스를 나와 주후해변을 걸어 다니며, 그가 가리켰던 건물이 이곳임이, 그의 말들이 사실임이, '녀석들'이 하는 말들이 다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한 순간에 입증되었다.
"이 건물 꼭대기층은 가족 전용 스카이라운지 층이고요, 그 아래층에 부모님 층, 그 아래 큰 형 층, 작은 형 층, 그리고 여긴 내 층이에요. 내가 집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엄마에게 연락이 가거든요. 사실.. 낮에 여자와 집에 들어오는 일은 처음이라... 엄마가 좀 놀라셨어요."
아난트는 여자라는 뜻의 '워먼'이라는 단어를 꾹꾹 돌다리를 밟듯 조심스럽게 발음했다. 그의 어머니가 놀란 건 '근본을 모르는 외국인 여자'를 집안에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날 집으로 데려왔어? 근처에 일반인 스카이라운지 카페 같은 곳 없어?"
"정말 여기가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고, 내가 잘 아는 가장 높은 곳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상하게 당신에겐 다 보여주고 싶어져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멋쩍어하며 시선을 돌리는 아난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아니 그가 나로 하여금 선을 넘어 이 공간에 들어오게 한 사실 자체에 내가 불안해졌다. 남편이 결혼할 때 '나를 지켜주고 싶다'라는 말을 했었다. 아들이 여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만큼 그 어머니는 아들이 채워주어야 하는 여자의 결핍을 경멸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누가 뭘 해 주고 싶다 하는 말을 덥석 받을 수 있는 여자는, 아직 그런 경멸을 가슴 찢어지게 겪어보지 못한 철 모르는 어린 아가씨들 뿐이다. 어리지도 않고 아가씨도 아닌 나는 정확한 계산 없이 결핍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계산을 제대로 못하는 치기 어린 호의를 덥석 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의 말을 무시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듯, 나는 대꾸 없이 창 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돌렸다.
한쪽으로는 뭄바이 시내 전경이, 다른 한쪽으로는 아라비아해가 훤하게 펼쳐져 있었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뭄바이 거리에 자욱한 뿌연 연기도, 타는 냄새도 없는 맑은 오전 햇살이 더없이 따사롭고 유쾌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마음은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놀라셨다면서. 우리 그냥 나가자."
낮의 사람들이 밤의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평화로운 공존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낮과 밤의 평화적 관계를 깨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아무리 아난트가 날 위해 뭘 보여주고 싶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의 밤을 침범할 마음이 전혀 없다. 아난트는 평화로운 공존의 조건을 이해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걸까.
"엄마에겐 잘 설명드렸어요. 한국에서 작가님이 오셨고, 이곳을 취재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왔다고 말씀드렸어요. 우리 부모님은 작가들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시고, 항상 과거의 이야기를 깰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다니라고 하시는 분들이라...."
그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이유가 이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부모에게 거짓말로 둘러대는 정도는 가식적일 수 있다는 것도.
"부모님... 사업하시는 분들이라면서? 이야기를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실까. 사업 아이템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내가 큰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라면, 자식에게 사업이 될 만한 아이템을 찾아다니라고 할 것 같은데..."
"이 세상의 큰 부자들이 정말 물건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왜 저 길거리에서 옷을 떼다 파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 않을까요?"
"그건 계급과 자본,... 그러니까 내 말은 시작점이, 기회가,... 다르지 않나?"
"인도 10대 부자 중 8할이 최고 계급 브라만이 아니라 중간 계급 바이샤인 거 알아요? 그리고, 많은 인도의 부자들은 자수성가로 기업을 일으킨 신흥 부자들이에요. 그중에는 드물긴 하지만 불가촉천민도 있어요. 내 말은... 인도가 카스트 문화 역사 때문에 골치 아픈 사회 문제들이 있긴 해도, 적어도 부자가 되고 못 되는 게 계급 탓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넌 뭐가 부자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저도 아직 확실히 다 이해를 하는 건 아닌데, 우리 아버지 말씀으로는 이야기를 다스리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세요. 브라만 계급이 오랫동안 최고 계급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 강력하고 신성한 신의 이야기를 손에 쥐고 사람들 스스로 낮아지게 누르고 귀한 건 뭐든 브라만에게 먼저 바치도록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세상은 급변하고, 브라만이 오랫동안 틀어쥐고 우려먹어 온 이야기의 힘 또한 수명이 다 했고, 점점 더 무너져 갈 거라고 하시면서,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하세요. 어떤 이야기를 믿고, 어떤 이야기를 거를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설득하고 열광하게 할 것인가...그런 것들이 힘의 원천이자 흥망성쇠의 관건이라고요. 가령, 불가촉천민 중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면서 힌두교와 인도 전통을 깨끗이 버리고 개종한 사람들이 많아요, 다르게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을 아무것도 도전할 수 없게 만드는 불가촉천민 신분에 고정시키려는 이야기들을 깨끗이 벗어버린 거예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족쇄 같은 이야기를 벗어버리고 스스로를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거죠..."
나는 아난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수무책의 힘에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지금까지 더듬어 왔던 '이야기'라는 것이 사실은 중심부에 블랙홀이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그 블랙홀에 이르러 무시무시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