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곳에서
이야기의 힘, 이야기가 하는 일을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할 생각을 감히 해왔다. 내가 아는 것이 짧고 단순한 만큼, 그저 그런 좁고 답답한 이야기 안에 나를 가두어 왔던 걸까.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 이만큼의 크기로 머물러 있는 걸까. 나도 아난트의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있었다면, 내 아버지라도 그리 일찍 돌아가시지 않고 지금까지 내 곁에 있었다면 내 삶의 이야기들은 전혀 달라졌을까. 세상이 만드는 이야기에 굴복하지 않고 제 삶을 일으켜 낸 어느 불가촉천민 출신 신흥 부자의 머릿속엔 어떤 계기로 무슨 이야기가 심겼던 걸까. 왜 누군가는 삶을 바꾸는 기적적인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걸까. 왜 난 그렇지 못할까.
어차피 내게 없는 것을 원해봤자, 자기 연민만 생겨날 뿐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아난트처럼 이야기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다. 아난트는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좋은 이야기 들을 게 있을 거라고 지금 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걸까. 아무리 심심하다고 해도 말이다.
"아난트, 난 너희 아버지처럼 부자도 아니고, 진짜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책을 낸 대단한 작가인 것도 아니고, 정말 보다시피 평범한 사람인데, 넌 내 이야기를 정말 듣고 싶어?"
"잠깐, 목마르지 않아요? 우리 뭐 좀 마시면서 이야기할래요?"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실은 몹시 목이 말랐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키고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던 게 기억났다.
"아이스커피 있어?"
"그럼요."
그가 전화기를 집어 드는 걸 보고, 난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아냐 아냐... 여기 이거 뜨거운 커피 아냐?"
"맞아요. 근데 아이스커피 원한다면서요."
"여기 아이스가 있고 커피 있으면 아이스커피잖아."
"아이스커피 잔이 없잖아요. 시럽도 없고."
"시럽 필요 없고, 여기 물 잔 있네. 여기다... "
"그건 물 잔이지 아이스커피 잔이 아니잖아요."
"야... 야! 됐어!"
아난트가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려는 걸 말리느라 한국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야? 데써?"
"내 말뜻은, 그래... 내가 오늘 너한테 '미니멀리즘' 이야기를 좀 해줘야겠다."
"미니멀리즘? 그거... 일본 문화?"
나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물컵에 아이스를 넣고, 뜨거운 커피를 따른 후 잔을 흔들었다. 친척집 눈칫밥 10년에 결혼생활 10년이면 인간은 못할 잡일이 없어진다. 아난트는 내가 마술이라도 부리고 있는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둥그렇게 뜨고 시선이 내 손만 따라다녔다.
"미니멀리즘이 어디서 시작된 문화인지는 모르겠고,..."
"아이스커피 됐네요!"
"그래, 미니멀리즘 정신은 이렇게 아이스커피도 뚝딱 만들지! 중요한 건 미니멀리즘 정신이야. 내 생각엔 너한테 그게 좀 필요한 것 같아서."
"나한테요? 왜요?"
"나도 뭐 엄청 깊이 아는 건 아닌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 사는데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치 않다는 거야. 최소한의 도구, 최소한의 재료만 가지고 심플하고 맘 편하게 살자는 거지. 예를 들어, 잔도 이 물 잔 한 가지만 있으면 못 먹을 음료수가 없잖아. 이것 하나만 있고 나머지 잔들이 없다고 하면 테이블에 자리가 더 많아지고 설거지할 것도 별로 없어지고 편해지잖아. 네가 알아서 커피를 간단히 만들어 먹으면 저 사람들한테 시킬 필요도 없고...그게 더 편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우리집 일을 도와주는 아니샤가 떠올라, 내가 앞뒤가 맞지 않는 꼰대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 깨달으며 말꼬리가 저절로 흐려졌다.
"글쎄요... 그게 진짜 편리한 걸까요. 내가 커피를 저 사람들에게 시키면 나도 편리하고, 저 사람들도 일거리가 있고 그럼 돈을 받고... 미니멀리즘도 좋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거 아닐까요... 하지만 뭐,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거니까요. 미니멀리즘에 대해 더 이야기해 봐요... "
분명 한국에서 독서모임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땐, 정말 획기적인 생각을 얻은 듯 사람들이 다 열광하며 모두가 순식간에 미니멀리스트가 되었었다. 너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껴졌었고, 그 좋은 걸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아난트 화장실의 금보석 장식만큼이나 명확하게 빛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아난트에게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려니 뭔가 안개가 낀듯 개념이 뿌옇게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키면 편한데, 시키면 저들도 일자리가 생기는 건데, 일을 많이 만들어서 일자리를 많이 주는 게 뭐가 나쁜 거지? 돈 많은 사람은 물건을 많이 사들이고 일을 자꾸자꾸 벌리는 게 세상을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 아난트 같은 녀석들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욕구가 딱히 없겠다는 생각. 아니, 아예 미니멀리즘을 추구할 필요가 없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설득되기 시작하면서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니멀리즘이 이렇게 부자 앞이라고 쉽게 가치가 떨어지는 그런 서민 전용 철학 개념이 아닐 텐데 싶어, 뭔가 아난트가 혹할 만한 구석이 없을까 머릿속을 마구 뒤졌다. 이대로 미니멀리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미니멀리즘은 분명 가치가 있는 개념이야. 내가 지금 정신없어서 말이 잘 안 나오는데, 내가 생각을 정리해서 다음번에 다시 설명해 볼게. 네가 미니멀 라이프 살기로 결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각오하고. 이게 한국 사람 반 이상을 미니멀리스트로 만든 그런 설득력 있는 철학이거든."
"오,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내가 오늘 집에 가서 영상을 보내줄게."
"미니멀리즘으로 유튜브 검색해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러면 되지. 찾아서 공부해 봐 봐."
"알겠습니다."
왠지 이 높은 곳에서는 생각도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난 아이스커피를 쭉 한 컵 그대로 들이켜고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제대로 뭄바이에서 가장 높은 곳 구경시켜줘서 고마워.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난 이만 가 볼게."
아난트는 양 팔과 어깨를 들어 올리며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해 줄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해줬잖아."
"뭐요? 미니멀리즘?"
"그래.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이 오늘 하려고 했던 얘기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오늘 아난트와 함께 오른 높은 곳이 그의 집이 아니라, 어느 건물 스카이라운지 카페였다면, 나는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갔던 남산 타워 이야기를 해줄 참이었다. 그때 아빠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무섭기도 했지만 무척 설레기도 했다는 것. 아빠와 갔던 남산타워 스카이라운지 식당이 천천히 움직이며 돌아가는 환상적인 곳이었다는 것. 거기에 서서 내려 본 서울 전경은 따뜻해 보였다는 것. 뭄바이 전경을 함께 보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잠시 행복했었던 시간을 다시 되살려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난트와 그의 집에서 보는 뭄바이 전경은 도무지 남산에서의 시간을 불러올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난트 같은 '녀석들'에게 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들' 덕분에 가장 편리하고 럭셔리한 방법으로 뭄바이에 접근하고 있을 뿐, 아난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던 것 자체가 새삼 어이없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가까워진 느낌에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그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미니멀리즘' 같은 유튜브에 검색이 가능한 이야기 정도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데...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어린 시절 이야기해 줘요. 난 미니멀리즘보다 그 이야기가 훨씬 재밌을 것 같아."
"재미? 재밌는 이야기를 원해?"
"내 말뜻은, '미니멀리즘'처럼 검색하면 나오는 이야기 말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좋아요. 그건 그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당신이 해 주는 거 아니면 들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라는 가치가 있죠."
"그런 게 너한테 무슨 가치가 돼? 내 생각엔 네 아버지가 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너에게 훨씬 더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가치라는 건 생각 따라 상황 따라 필요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겠죠. 지금의 저에게 가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내 마음속에 열정을 만들어요. 내가 좋아해서 열심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게 언젠가 가치가 되는 거라고 하셨어요."
"너희 아버지께서?"
"네. 아직은 제 생각이 짧아서 아버지가 말씀해주시는 것들을 많이 따르고 있어요."
아난트가 내 반문에 멋쩍어하며 뒷머리를 긁는 모양새가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현명하고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니 참 좋겠다. 그럼 오늘은 딱 하나만 이야기해 줄게. 난 아버지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돌아가셨어. 그리고 엄마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재혼하시고... 나는 할머니 손에 크다가 친척집 전전하면서 살았어. 그 생활 벗어나고 싶어서 빨리 결혼했고, 지금 10년째 결혼생활 중이고... My life is not so perfect."
내 인생이 좀 찌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찌질하다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not so perfect'라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뱉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이게 문제다. 정확하게 마음이 표현되지 않고, 말실수가 많아 자꾸 곱씹게 되고 그게 쌓여, 정신적 피로감을 준다. 'not so perfect'는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뜻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그뿐 아니라, 어릴 때 좋았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었는데, 난 왜 이런 식으로 부담스럽게 말하고 있는 걸까. 마치 아난트의 궁궐 같은 공간이 성스러운 신전처럼 느껴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백해야 할 것만 같았던 건지도 모른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난트가,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아이처럼 잔뜩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당신보다 많이 어리고, 세상을 잘 모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주는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어요. 이게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난 당신에게 현명한 조언 같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혹시나 당신이 지금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면 나에게 언제든 말해도 좋아요. 내가 가만히 들어 드릴 수는 있어요."
늘 장난꾸러기 같은 태도로 받아치는 아난트였기에, 이렇게 진지하게 대답할 줄 몰랐다. 더욱이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가만히 들어줄 수 있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성숙함은 놀라울 정도여서 나는 아무 말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새파란 총각 예수 앞에서 다섯 명 남편의 존재에 대해 실토하던 우물가 중년 여인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예수가 여자의 진실을 끌어낸 것일까, 여자의 마음이 모르는 사람에게 - 제 삶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 준 - 마음을 토해야 했을 만큼 생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성자에게 진실을 털어놓은 그 여자의 삶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날 여자는 집에 가서 엉엉 울었을 것이다.
10살이나 어린 '녀석' 앞에서 눈물을 쏟고 싶진 않았다. 빨리 이 높은 곳을 떠나야 했다. 이젠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빨리 내려오라고 익숙한 현실이 미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