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아수라장
어릴 때 여름방학 숙제를 미룬 적이 있었다. 하루하루 미루면서 고통스러워져 가던, 신경이 바짝바짝 타는 듯하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강렬한 무엇이었다. 하루 종일 마음이 가는 대로 만화책을 읽고, 티브이를 보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쏘다니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긴 하루하루는 여유와 재미가 가득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편에 검은 기운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불길하고 불안한 느낌에 밤에 악몽까지 꾸던 기억이 있다.
지금, 하기 싫은 일을 미루며 내 맘엔 그때의 그 검은 기운이 가득 차올라 있다. 지금 나에게 여름방학 숙제는 남규식이다. 그런데 이 숙제가 단순하지 않다. 정답이 자꾸 왔다 갔다 헷갈린다. 1번, 지금부터라도 그를 자주 만나 그를 만족시키고 다시 신뢰를 회복할까. 2번, 이대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밀어붙이고 내 영혼에 자유를 줄까. 1번과 2번 중에 내가 선택해야 할 정답이 뭔지 정말 헷갈린다. 둘 다 희생되어야 할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희생할까 일자리를 희생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답이 아니다. 당장 편하자고 하다가 미래를 영원히 잠수시키는 일이 될까 봐, 미래를 지켜보겠다고 내 목숨을 거는 꼴이 될까 봐, 이래도 두렵고 저래도 마땅찮다.
남규식은 지금쯤 무척 화가 나 벼르고 있을 것이다. 뭄바이에 오면 뭄바이를 잘 아는 '본인 전속 노예'가 실컷 관광도 시켜주고, 외국이라 가능한 자유로운 불륜 욕구도 채워 줄 것이라 기대하고 상상했을 것이다. 몸살이 났다, 아이를 돌봐야 한다, 남편이 의심하는 눈치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온갖 핑계를 만들어 대고 그를 피해왔다. 남규식은 처음엔 그러냐고 '며칠 기다리지 뭐' 하다가, '이 멀리까지 너 하나 보고 왔는데 이렇게 찬밥 취급이냐'며, '지금 하는 거 다 돌려받는다'라고 협박을 하다가, 그마저도 지쳤는지 어제오늘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조용하다는 것이 기분이 괜찮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한 달 여행 계획에서 2주를 기대와 달리 혼자 호텔방에 갇혀있었을 테니, 사실 죽을 맛일 거다. 소똥에, 개똥에, 곳곳에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인도 거리가 더럽다고, 공해 자욱한 도시의 기후가 습하고 덥다고, 교통마저 혼잡 난잡하다고, 나가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뭔 놈의 나라가 이러냐고 불평에 불평을 거듭하고 있을 거다. 무엇보다, 이은수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네 밥줄 쥐고 있는 귀한 주인님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이렇게 팽개쳐 둘 수 있냐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숙제를 미뤘던 그 여름방학 때, 개학을 일주일쯤 남겨놓고 어린 마음에 속이 타들어 갈 대로 타들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자다가 머리를 뜯으며 벌떡 깨곤 했다. 다급할 때로 다급해진 내 안의 무언가가 튀어나와 그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일기장을 펼쳤다. 매일 썼어야 할 일기를 하루에 몇 개씩 쓰고, 혼자서 난리 법석을 떨고 있으니, 아빠가 와서 만들기와 그림 숙제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개학 날 두 팔 가득 방학 숙제를 들고 갈 수 있었다. 심지어 만들기 작품은 복도에 전시되고 칭찬도 받고 상도 받았다. 그때 느꼈던 구원의 손길과 안도감 또한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이라도 남규식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 그런 구원이 올까. 마음이 편해질까. 아...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질 안는다. 답이 나질 않아서 나는 글도 손에 잡히지 않고, 불안한 만큼 종종거리며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다. 이것저것 한식 재료를 다 꺼내, 밑반찬을 몇 가지나 만들어 냉장고에 쟁이고, 오후 내내 만두도 빚어 몇 봉지나 얼렸다.
저녁으로 만둣국을 해 먹고, 유리는 영어 숙제를 하고,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차 끓일 준비를 한다. 남편은 오늘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었다. 인도지만 한국 회사라 가끔 간단한 저녁 회식 같은 걸 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몸을 쉬지 않아서인지, 온몸이 쑤시며 몸살 기운이 확 밀려온다. 마음을 차분히 글로 정리라도 해 보자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홍차 잎과 우유, 설탕과 생강을 푹 끓여 짜이 차를 만들었다. 한 잔은 유리에게 갖다 주고, 나도 뜨거운 차를 한 입 들이켜며 서재방 책상 앞에 앉는다. 한참 만에 앉아 보는 다리가 시큰거리고, 몸이 으슬으슬한 게 몸살기가 확실한 것 같다. 짜이 차를 끓이길 잘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가득 마시면 몸에 온기가 돌고,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쾅쾅'
밖에서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남편은 주로 열쇠로 문을 따고 조용히 들어오는 사람인데 어찌 된 일일까 싶어, 2층 서재방에서 집 앞을 내려다본다.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누군가를 남편이 들쳐 없고 비틀거리다가 또 쾅쾅 문을 두드린다. 술 취한 동료를 집으로 데려온 건가.
1층으로 내려가는데, 요란한 문소리에 놀라 제 방 밖으로 튀어나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유리도 내 뒤를 따라 내려온다. 문을 여니, 술냄새가 훅 들어온다.
“이 사람이 술을 혼자서 막 마시는 거야. 호텔 호수도 모르겠고. 로비에 던져놓고 올 수도 없고, 일단 집으로 데려왔어.”
남편 등에 업힌 인간은 남규식이다. 짜이 차로 잠재우려 했던 몸살기가 남규식의 등장에 극심한 두통과 함께 확 일어난다.
“아빠 왔어? 어, 그때 그 변.. 아저씨네.”
유리가 남규식을 알아본다.
“일단 너무 무거워서, 좀 눕힐게. 어디에 눕힐까?”
나는 눈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친 욕을 하며, 거실 소파를 가리킨다. 남편이 남규식을 질질 끌고 가서 소파에 던져 놓는다.
"진짜 이러려고 한 게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어서... 만나자마자 술집에 데려가 달라고 하더니, 그냥 예고도 없이 계속 들이붓는 거야. 뭐가 괴로운 일이 있나 봐. 다행히 나한텐 운전하셔야 한다며 술을 권하지는 않더라고. 이 사람 마시는 거 보니까 일 치겠다 싶어 술이 넘어가지도 않고. 술 취한 사람 수발하는 거 인도에 와선 한동안 안 했더니 와... 이거 못할 짓이더라. 다신 못 할 것 같아."
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와서 입을 열어 뭐라 대꾸할 힘도 없다.
"나 오늘 몸살기가 좀 있어서 일찍 들어가서 잘게. 당신이 알아서 저 사람 챙기든지 말든지. 난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
“은수야… 가지 마... 제발 이리 와 은수야….”
남규식의 입에서 내 이름이 뱉어진 순간, 뒷골이 당기다 못해 후두둑 끊어지며 무언가가 터져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스라한 느낌에 휩싸인다. 저 인간이 내 가정을, 내 사생활을 뭉개 짓밟으려고 작정을 하고 술을 마신 게 틀림없다.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규식을 향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극한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저 인간이 뱀파이어라면 지금 딱 심장 한가운데 말뚝을 박았으면 싶지만, 저런 인간 하나 때문에 나머지 인생을 감방에서 썩을 수는 없으니 부들부들 떨려오는 살의를 꾹 눌러 참는다. 두통이 심해지다 못해 눈 앞이 깜깜해지고 양쪽 귀까지 웅웅거리며 아파온다. 나는 통증을 견디려고 눈을 꾹 감아 버린다.
유리와 남편의 눈이 둥그레진 게 안 봐도 보인다. 이름 똑같은 사람이 또 있나 보다고, 아니면 나를 짝사랑한 독자인가 보다고 능청스럽게 가식을 떨고 싶은데, 극심한 두통 때문에 내 얼굴이 도무지 가면을 쓰지 못한다.
“유리야, 잠시 방에 들어가라. 엄마하고 이야기…”
유리는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2층으로 쪼르르 올라가 제 방으로 쏙 들어간다.
“너희 원래 아는 사이지.”
남편이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 집 현관 앞에 서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내 입에선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내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편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 작가도 아닌데, 공항에서 너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고, 몇 번 거절하는 데도 자꾸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 집에 한 번 오고 싶다고 계속 떠보는 것도 이상하고, 오늘 작정한 사람처럼 술을 너무 들이붓는 것도 이상하고,… 다 우리 집에 와서 너 만나려는 수작인 거지? 넌 이 상황 피하고 싶어서 계속 예민하게 굴고 화내고… 둘 이서 날 갖고 논 거지?”
변명을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놈의 빌어먹을 두통.
“너희 언제부터 아는 사이야, 어떻게 아는 사이야? 무슨 사이야? 저 새끼 누구야!”
차분하게 빈정대던 남편은 결국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인다. 내일 아침이면, 동네 주재원 부인들 안주 거리로 이 집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르겠네 싶다.
남편은 갑자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술 취해 뻗어있는 남규식의 몸 위에 걸터앉아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야! 너 내 와이프하고 아는 사이지! 일어나 대답해 봐 새끼야!"
한 번도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은 오래 사람을 때리지도 못한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자괴감이 몰려와 거실 바닥에 자빠져 엉엉 울기 시작한다.
이번엔 내가 남규식에게 다가가 마구 발길질과 주먹질을 시작한다.
"야, 이 개새끼야! 어디라고 여길 와! 내 인생 그만큼 말아먹었으면 됐지. 내 식구들까지 건드려! 이 개새끼 이 악마 새끼. 이 새끼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나를 농락하고 내 피를 빨아먹고 나를 죽였어. 이 새끼 정말 나쁜 새끼야. 오늘 밤 죽여버리자 이 새끼."
웰컴 투 아수라장. 모든 게 다 쏟아지고 지구가 흔들리고 뒤집어지고 난리가 난다.
남편은 미쳐가는 나를 말리려다가, 감정이 더 크게 북받치는지 오열하며 바닥에 쓰러져 뒹군다. 나는 오랜 울분이 쌓여 남규식을 좀 더 오래 때릴 수 있다. 머릿속으로 유리가 걱정이 되지만, 내가 남규식을 때리지 않는다고 더 나아질 건 없어 보인다. 나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를 때리고 또 때린다. 몸살기가 있어 그런지, 그를 때리면 때릴수록 내 몸이 더욱 아파온다. 결국 나는 온 힘을 소진하고 쓰러져 버린다.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유리가 소리를 지르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걸 얼핏 본 것 같다가 의식이 끊어진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유리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아이에게 이런 꼴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라는 후회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강한 요의를 느끼며 얼핏 눈을 뜨는데 머리가 빙글 돈다. 머리는 머리대로 어지럽고, 몸은 몸대로 천근만근 무겁고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다. 눈을 다시 감은채 천천히 의식을 회복하노라니, 어젯밤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차례로 떠오르며, 저절로 눈이 번쩍 떠진다. 방을 둘러보니, 유리가 이불도 덮지 않고 옆에서 쓰러져 자고 있다. 내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있고, 주삿바늘에 연결된 줄의 끝에는 누군가 옷장에 기술 좋게 걸어 놓은 수액 봉지가 달려 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강한 요의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유리야, 나 좀 도와줘."
유리가 눈을 떠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금새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눈치다.
"나 오줌이 너무 마려운데, 일어나질 못하겠어."
유리가 그제사 정신이 드는지, 제 눈을 비비며 일어나더니, 뭔가 떠오른 듯 방 밖으로 뛰어나간다. 그리곤 아난트와 처음보는 인도 여자 한 명과 함께 방으로 다시 들어온다.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내 몰골이 어떤지 염려하기엔 오줌이 너무 급하다. 다행히 인도 여자가 여느 병원의 간호사 같은 손놀림으로 내 팔에 연결된 주사를 빼고, 익숙한 동작으로 나를 부축한다. 유리가 앞서 안방 화장실로 안내하고, 화장실에 들어선 나는 화장실까지 따라온 두 사람에게 '여기서부턴 혼자 할 수 있다'라고 혼신의 힘을 짜내서 말한다. 문을 닫고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은 다리가 달달 떨리고 머리는 심해 깊숙한 데로 내려간 듯 거센 압박감이 욱신거린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같이 왔던 둘이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나를 부축해 방 침대에 누인다.
아난트가 쟁반에 음식같은 것을 담아 와서 유리에게 건네준다. 내가 누워있는 쪽을 잠시 응시하더니, 유리에게 뭐라 짧게 설명하곤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어제 엄마는 쓰러지고 아빠는 기진맥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다 전화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난트 쌤한테 문자를 했어요. 근데 생각나는 영어가, doctor 하고 help 밖에 없는 거예요. 그 두 단어 하고, 여기 주소만 딱 찍었는데, 아난트 쌤이 의사 쌤하고 같이 금방 왔던 거예요."
"너 어떻게 아난트 쌤 전화번호를 알았어?"
영어도 인도에 관한 지식도 없는 유리가 어떻게 이렇게 일처리를 해 놓았는지, 어떻게 날 구해놓았는지 신기하다. 특히 아난트의 연락처를 알았다는 것이, 아난트에게 연락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제가 잘생긴 남자들 연락처는 좀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거든요. 첫 수업 마치고 아난트 쌤이 영어 수업 데려다줄 때 그때 번호 따서 저장했죠."
애는 어젯밤 어른들이 벌이는 그 난리를 보고도 하나도 상처 받지 않았다는 듯,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아빠하고 그 아저씨는?"
"그 아저씨는, 의사 쌤이 응급차 불러서 데려갔고요. 아빤 아래층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데, 의사쌤이 떠나면서 불러 준 간호사 쌤들이 새벽부터 와서 죽도 끓여주고 돌봐주고 있어요."
"아난트는 그럼 우리 집에서 잤어?"
"제 방에서 잤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 옆에서 잔 거예요."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언급한 것에 내 심장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심장 어딘가에 불길이 일어나는 느낌이다. 아이는 이렇게 내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눈치다.
"의사 쌤이 가기 전에 뭐라 복잡하게 영어로 설명을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말해줬어요.
'Your mom.. too much work! Your dad... shocked and depressed! That man... too much alcohol!'"
유리가 인도 사람 발음 흉내를 내며 말을 해서, 이 와중에도 난 웃음이 난다. 하지만, 똑똑한 아이가 어디까지 상황을 파악한 걸까, 아이는 날 경멸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밀려와 내 마음의 웃음기를 금방 걷어 낸다. 대놓고 자세히 아이의 마음을 생각을 물어볼 순 없어, 질문을 두리뭉실 우회시킨다.
"너 어제 많이 놀랐지? 괜찮아?"
"놀랐죠 많이. 그렇다고 내가 괜찮지 않을게 뭐가 있겠어요. 주변에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고, 밥 잘 먹고 따뜻한 집에 보호받으며 살고 있는 데요. 그냥 어른들이 다 쓰러져 있으니 많이 걱정이 됐죠."
"실망하지 않았어?"
나는 이 아이가 나에 대한 존경심과 호감을 잃어버렸는지가 너무 걱정돼, 심장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겨우 묻는다. 역시 나는 아이에게조차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는 관종 중의 관종임을 깨닫는다.
"실망은 모르겠고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날 버리고 떠날까 봐 무섭긴 했어요."
결국 유리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유리의 눈물을 보자마자, 내 눈에도 눈물이 솟아 나와 관자놀이를 타고 머리카락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혹시 내가 잠시 떠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나는 언제나 네 가까이 있으면서 너와 소통할 거야."
유리가 와락 나를 껴안는다. 얘는 아직 아기구나 싶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 내 곁에 있어 줘요."
이미 저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 나는 평생 네 엄마로 살게. 내가 제대로 된 엄마가 되려면 먼저 진흙탕에 빠져 있는 내 인생을, 내 영혼을 먼저 구해내야 하는데, 그것만 조금 기다려 줘."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좋은 엄마까지는 몰라도, 믿을 수 있는 엄마는 되어줄게. 약속."
손가락을 걸어주니, 아이는 불안한 마음이 풀리는지, 내 목에서 제 팔을 풀고 배시시 웃는다. 진짜 모녀 사이처럼 유리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고, 눈을 맞추고 함께 웃으면서, 내 맘 속의 큰 응어리 하나가 녹아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엄마, 이거 먹어요. 인도 간호사 쌤이 끓여준 거래요. 음식 이름이 '키르'라고 하던가?"
그냥 보기에는 흰 죽 같다. 유리가 억지로 손에 쥐어주는 숟가락을 잡고 한 입 먹어 보니 꿀을 잔뜩 넣은 듯 달달하다. 예전에 인도식당에서 디저트로 나온 걸 먹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디저트가 환자식도 될 수 있구나 싶다. 식당에서 먹었던 맛보다 훨씬 짙은 고소함이 느껴진다. 아몬드 조각, 말린 대추 조각 같은 덩어리들이 들어 있는 것도 그때 디저트로 먹었을 때와 다른 것 같다.
죽이 달아서 생각보다 잘 넘어간다. 달지 않았다면 편토가 붓고 입이 써서 뭘 삼키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부지런히 음식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내 안에서 어떤 삶의 의지 같은 것이 강한 힘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먹고 힘내야 한다는 의지가 용솟음치는 만큼, 열심히 숟가락질 해서 죽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인도가, 인도의 모든 것이 나를 돕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구원받기 위해 인도로 오게 된 것이 틀림없다. 다시 세워지기 위해 지금 부서져 누워있는 게 틀림없다. 이제 답은 정해졌다. 이젠 혼돈도 갈등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