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관종 여우 12

어둠을 찢고 나와 주인공이 서야 할 빛 가운데

by 하트온

어릴 때부터 소설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나는 나를 소설가라고 부를 수 없다. 소설로 등단도 했고, 꽤 이름 있는 여성 잡지에 소설 연재도 하고 있지만, 아직 내 글이 책으로 출간되고 외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힐 가치가 있는 문학 작품으로, 마음을 울리고 기억에 남을 힘을 가진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항상 여자 주인공이다. 아무리 드라마틱한 사연과 상황과 조건들로 포장을 시켜도, 주인공다운 생각과 성격과 행동을 부여하는 일은, 자꾸 막히는 변기처럼 난감하고 막막해진다. 소설 소재며 시작이 흥미롭다고 좋은 평을 듣고 시작을 해도, 끝에 가선 여자 주인공이 너무 수동적인 것 같다라거나, 색깔이 분명치 않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만다.


나는 그것이 나의 한계, 작가 경험의 한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슬펐다. 내 삶이 주인공다운 데가 없으니, 내 소설의 여주도 주인공 캐릭터를 가지지 못하는 것만 같아, 서러웠었다. 내 삶의 결핍들이 내 소설에도 빈 구멍들을 만드는 것만 같아, 아무리 안달복달해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갇힌 것만 같아 답답하고 애통했었다.


그랬던 내가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 지금 나는 무언가 뻥 뚫린 시원함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 동안 거의 침대와 한 몸으로 먹고 자고 쉬기만 했을 뿐인데, 뭔가를 뛰어넘어 주인공 캐릭터에 한 발 다가간 느낌. 주인공의 힘이 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내가 남규식과 싸우고 때리고 이긴 것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과장이 있긴 해도, 주인공의 영웅적 성취는 온전히 내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그의 악행을 알리고 정의를 이룬 것도 아니건만, 그로 하여금 원래 여행 일정을 당겨 더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쾌감이 든다. 며칠은 맞았다고 고소라도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말없이 문자도 없이 꽁무니를 뺐다는 사실이 내게 큰 승리감을 준다. 내가 남규식을 피해 잠수를 타고 결혼하고 숨어 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다. 세상은 도망가는 쪽이 지는 것이고 힘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그가 도망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세상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그냥 아파 누워 있기만 해도 시간과 상황이 해결해 주는 일들도 많다는 것을 새로이 느끼고 있다. 유리는 아난트가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고 하는 서비스를 받고 더욱 행복해하고, 아난트와 더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위해 영어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남편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일 없이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 중인 듯하다.


"나, 이대로 괜찮지는 않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내가 생각이 정리되면, 우리가 헤어지거나, 생활이 달라져야 하는 결론이 날 수도 있겠지. 그때까진, 조용히 그냥 푹 쉬고 몸 회복 해. 어디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결론이 뭐든 그건 내가 정할 거야."


결정장애 남편에게 이 숙제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그의 어머니에게 판단과 결정을 맡기면 훨씬 수월할 텐데, 그는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굳이 혼자 숙제를 해보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내겠다는 태도 하나만큼은 큰 점수를 받을 일이긴 하다. 남편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주가 되기엔 무리가 있지만, 이 정도 발전이면 비중 있는 조연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자 신호가 들어와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아난트다.


[몸은 좀 괜찮아요? 몸 낫고, 시간 되는 대로 좀 만나요. 말해 줄 게 있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진짜 영웅은 아난트인지도 모른다. 아난트가 주인공인 소설이라면, 내가 여주까지는 몰라도 괜찮은 캐릭터의 비중 있는 조연이 되도록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 도리부터 할 일이다. 그에게 갚아 줘야 할 것들부터 갚을 일이다.


[이제 많이 나아졌어. 일요일에 혼자 나갈 수 있는데, 스타벅스에서 볼까.]





아난트는 난데없이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나 내 눈을 둥그렇게 만들고. 나는 돈봉투를 들고 나타나 아난트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다. 아난트의 서류가방이 궁금했지만, 일단 돈봉투 먼저 들이밀었다.


"그동안 나하고 유리 도와주고, 남규식 병원에 보내고 처리하고 한 거 정말 돈으로 못 갚을 은혜인 거 아는데, 그래도 조금은 고맙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싶어서 준비했어. 노력하고 쓴 것에 비해 많이 부족할 금액이라 미안해."


아난트는 만면에 부처를 닮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한 몸짓으로 봉투를 되돌려준다.


"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덕을 베풀어 제 영혼의 행복, 제 다음 생의 행복을 쌓아나가는 거예요. 이야기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있지만, 덕을 쌓을 기회를 찾으려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어요. 이걸 받으면 제 영혼에 복이 쌓이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주지 마세요. 당신의 고마워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고, 당신의 건강해지고 편안해진 영혼을 보는 것만으로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도움을 베풀어 영혼에 행복을 쌓는다는 말, 내 영혼이 잘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아난트의 예쁘고 지혜로운 말들이, 그의 자비롭고 친절한 마음이, 첫눈처럼 신비롭게 천천히 내 마음에 내려앉다가, 말을 꼬아서 생각하는 부정적인 내 본성에 닿아 흔적 없이 녹아 버린다. 아난트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는 무척 기분이 좋았는데, 막상 도움을 준 사람이 도움을 베풀었다고 말을 하니 그 말이 내 마음에 달지만은 않다. 진짜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으면 다라비 - 뭄바이 최대 슬럼가 - 에나 가 볼 일이지, 왜 스타벅스에서 만난 사람을 돕나 하는 마음도 올라온다. 인간이 이렇다. 실컷 도움을 받아 놓고도, 은인의 방식을 비난하고 고치려 드는 것이 인간이다. 내 감정 내 입장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딱 정확하게 계산해서 받을 걸 받으면 내가 할 도리 다 한 주인공 같고, 내 맘도 훨씬 더 편해질 것 같은데, 베푸는 공덕과 영혼의 잘됨과 다음 생까지 따지는 인도식 계산법이 내겐 골치가 아프다. 하긴 내가 쉽게 갚을 수 없는 돈을 갚아내라고 해도 골치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니, 어차피 내 돈 받으나 안 받으나 그에겐 껌값일 테니, 인도 계산법을 존중하고 영혼의 복이나 빌어주자 결론이 내려진다. 어쩌면 이게 아난트가 스스로를 더 주인공 영웅으로 만들어 가는 그의 인생 전략일 수도 있다. 주인공 자리를 놓고 다투기엔 내가 그에게 받은 게 많으니, 결투를 포기하는 총잡이가 권총을 허리춤에 다시 꽂아 넣듯, 돈봉투를 도로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돈봉투를 치우기 바쁘게, 그가 서류 가방을 열어 뭘 주섬주섬 꺼내 카페 테이블 위에 펼친다.


"내가 남규식 뒷조사를 좀 해봤어요. 사실 유리가 많이 도와줬어요..."


이건 무슨 전개인가. 유리가 뭘 도와줬다는 건가! 유리가 어디까지 뭘 알고 있나 가늠을 해 보느라 머리가 멍해진다.


"뭐? 유리? 뒷조사?"


네가? 유리가? 왜? 언제? 어떻게? 무엇을? 어디서? 육하원칙 순서대로 물음표가 줄줄이 떠오르는데 너무 한꺼번에 떠올라 말이 서로 엉켜 제대로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유리는 남규식 소속 학교하고 약력 같은 것들을 검색하는 걸 도와주기만 했고요. 나머지는 제가 사람 시켜 조사했고, 그 내용도 저만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유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내가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고 직감한 아난트가 눈치 빠르게 설명을 덧붙인다. 나는 아난트가 따로 사람을 시켜 조사했다는 말에 한 번 더 기함한다. 재벌가는 어느 나라 사람이건 뒷조사가 기본인가!


"저희가 거래하는 투자 회사 중에 한국 금융 대기업도 있어요. 'KS 증권'이라고..."

"남편이 다니는 회산데? 그 KS 증권이 여기서 왜 나와?"


왜 여기서 남편이 다니는 회사 이름이 나오고 난리인지. 나는 아난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터질게 다 터지고 하나하나 정리되어 가는 중이라고 느끼며, 그동안 도움받은 거 깔끔하게 정리하러 나온 자리에서, 인도식 돈 계산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다시 엉켜 들어가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아, 그래요? 암튼 그쪽 인도 지사 사장 가족하고 저희 집 하고 가끔 식사 자리가 있거든요. 그쪽에서 고객관리 차원에서 만드는 자리죠. 제가 그쪽 사장님한테 사람 좀 알아볼 수 있냐고 슬쩍 떠봤는데, 본사 내부 정보팀 하고 인맥이 닿아 있어서 쉽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실은 그쪽에서 요즘 아빠가 거래 회사를 골라 추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 굉장히 신경 쓰고 저희 아빠 마음을 잡으려고 안달이 난 상황이라 부탁하기가 좀 수월 했어요. 아빠는 그 한국 금융 회사가 기반이 탄탄하고 일 잘한다고 어차피 좋게 보고 계셔서 그럴 필요도 없는데, 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저절로 생긴 물살을 좀 탔죠..."


이런 말을 듣고 있노라니, 아난트가 '녀석'이 아닌 '영리한 사업가' 같다. 급류 타기 잘하는 영리한 예비 사업가, 유능한 인재,... 이런 아난트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새로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멋지게 팔색조 매력을 과시하는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캐릭터 아난트와 즐거운 이야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남규식 뒷조사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슬퍼진다. 그를 이 추잡한 스토리에 엮이게 한 것이 죄를 지은 것만 같다.


"알고 보니, 남규식한테 당신과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내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데?"


나는 아난트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다. 정색을 하는 내 반응에, 아난트가 움찔하며 누군가 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눈 것처럼 자세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한참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고르는 표정이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앞서갔어요. 이야기 조각만 보고 전체 이야기를 넘겨짚고 달리는 나쁜 버릇이 있어요. 전에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그 사람 이야기하고, 당신 집에 술 먹고 온 남규식 하고, 유리가 그날 밤 들은 이야기 조각들하고... "


아난트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신이 큰 실례를 범했다 싶은지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떨군다. 나는 왜 아난트를 이렇게 얼굴까지 떨구게 만들고 있는 걸까. 아난트가 도와주려는 마음을 어디까지 받아야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마당에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해주고 싶지만, 또 한 편으론 내 어렸던 날, 뭘 몰랐던 날들의 선택에 대한 수치심이 너무 커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난트와 나 둘 다 좀처럼 우리 앞에 쏟아진 정적을 차마 치우지 못한다.


"제가 큰 실수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난트가 먼저 정적을 밀어내며 반듯하게 사과한다. 그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프린트물들을 착착 정리해 도로 가방에 넣는다. 마치 의도했던 거래가 성사될 수 없었던 것처럼 돈봉투도 서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는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숨기면 숨길 수록 나도 '불안하고 비참한 현실'이라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니, 이젠 제자리란 없다. 내가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영리한 아난트는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 유리도 알만큼 알고 있다. 이젠 될 대로 되라고 내려놓고 펼쳐 놓을 길밖에 없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 마음을 털어낸다.


"저기... 내가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래."


고백의 말과 동시에 무언가가 내 속에서 터져 나온다.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손가락 사이로 막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오열하고 있다. 나는 한참을 어깨를 들썩거리며 운다. 아난트가 의자를 당겨와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한참을 내 등을 토닥토닥 아기 재우듯 두드린다. 내 울음이 좀 잦아들자, 아난트가 다시 사과한다.


"정말 미안해요. 당신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울지 마세요. 당신 잘못 아니에요. 남규식이 나쁜 놈이에요. 제가 이렇게 어렵게 영혼에 쌓은 복을 하루 만에 다 까먹습니다."


나는 아난트의 마지막 말에 울다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라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아난트, 나 휴지 좀..."


아난트가 휴지를 잔뜩 뜯어와 갖다 준다. 나는 대충 닦고, 화장실로 달려가 엉망이 된 얼굴을 마저 수습한 후 자리로 되돌아온다.


"미안해... 내가 더 좋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어서. 난 그게 부끄러워. 너한테도. 유리한테도."


안 그래도 사슴 같은 아난트의 눈망울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더없이 슬프게 반짝인다. 나는 이 해맑은 청년에게 이런 슬픈 눈빛을 입힌 것이 너무 미안하고 슬프다.


"그거 당신이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유리한테 들었어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 어리고 힘없는 당신을 그렇게 휘두르고 이용한 남규식 잘못이에요."


애들은 정말 영어를 빨리 배우나 보다 싶다. 유리 영어가 그런 설명을 할 만큼이나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에 나는 기가 막힌다.


"남규식이 잘못했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부분도 있어서 수치스러운 거야."

"악마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골라서 유혹을 하는 거예요. 악마가 그런 힘들고 약한 사람들을 찾아 공략하는데 어떻게 피하겠어요. 그리고 그놈은 당신한테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난트는 아까도 그 말을 하려 했었던 것 같다. 다른 피해자가 있다고...


"정말 다른 피해자가 있어?"


아난트는 내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는지 확인하듯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더니, 다시 제 서류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내 테이블에 펼친다.


"혹시 '김종희'라는 이름 들어 보셨어요?"


김종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무의식 어딘가 깊은 곳에 다시 꺼내볼 일 없다는 듯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어떤 기억 한 조각이 드디어 이름을 불린 꽃처럼 떠오른다. 대학 1학년 내내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며 사람을 이상한 방법으로 괴롭히던 선배였다. 심지어 그녀는 졸업을 하고 나서도 나에게 편지를 보내 내 마음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곤 했다.


"김종희... 알아... 학교 선배야. 그 사람이 여기서 왜 나와?"

"그 사람도 남규식 피해자예요. 몇 년 전 '미투 운동' 한참 일어날 때, 그 사람이 본인 페북에 남규식에 관한 글을 올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남규식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맞고소하고 난리가 한 번 났었나 봐요. 그런데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남규식 무혐의, 그 여자분은 정신적 문제가 좀 있는 사람으로 정리되고 끝났대요. 여기 그 사람 페북 글하고 페북 주소, 그리고 당시 났던 기사들 프린트한 거예요. 그 사람 페북에 들어가서 한 번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도 계속 글을 올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난트가 내미는 프린트물들을 받아 들며 나는 내가 오랫동안 어둑한 곳에 묻어 두었던 대학시절 기억들이 한꺼번에 내 마음에 쏟아져 들어오는 속도감과 무게감을 동시에 느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 그림을 완성하는데 몇 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그림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야 완성된다.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도 그렇다. 내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지금 자각한다. 내 생각 속에서만 사느라 바빠, 한 번도 주변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금 깨닫는다. 투명인간처럼 겉돌고 부유하던 학창 시절, 나는 내 자괴감 안에 나를 철저히 가두고, 내 이야기를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는 걸, 그때의 나는 혼자 자격지심에 눌려 귀를 막고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발악했다는 걸, 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말들이 실은 같은 상처를 겪은 사람이 내미는 상처 입은 거친 손이었다는 걸 지금에야 똑바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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