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관종 여우 15

숲의 정령

by 하트온

눈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고 서 있지만, 뼛속까지 관종인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온 신경세포가 몰려 있다. 모델 비율을 자랑하는 인도 이민호는 어김없이 화려한 시선몰이를 담당하고 있고, 아난트와 커플룩을 목표로 신경 써 차려입은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키 큰 유리도 청순미가 흘러넘치는 데다, 검은 페도라를 푹 눌러쓴 센 언니 분위기의 나도 심상히 지나칠 수 있는 비주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하는 이 관종 본능은 언젠가 나이 먹으며 떨어져 나갈 것인지 아니면 평생 붙어 있다, 내 최후의 모습까지도 신경을 쓰게 만들지 궁금하다.


오늘 약속이 있는 나는 관종 본능을 잠시 접고 오늘 하루 세 사람분의 계획을 짜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단, 유리에게 현금과 카드를 쥐어주며, 몇 시간 동안 아난트 선생님을 관광시켜 드리고 잘 대접해 드리라고 당부하고, 나는 광화문 스타벅스 안으로 혼자 들어왔다. 광화문 스타벅스를 고른 건, 서대문구에 있는 김종희의 오피스텔 사무실과 옥수동 집의 딱 중간 즈음에 위치한다는 사실도 한 몫했지만, 경복궁을 비롯해 볼거리 할 거리들이 많아 유리와 아난트가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 적당하겠다 싶어서였다. 교보문고 서점도 가까이 있어, 집에 가는 길에 들러야지 싶기도 했다.


광화문 스타벅스 2층 창가 자리, 아담하고 편하게 생긴 노란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내가 서울을 떠난 지 채 3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인도 거리에 익숙해져 버린 내 눈엔 창밖 광화문 거리 풍경이 이상하리만치 이국적이고 낯설다. 거리에 덩치 큰 소와 개들이 출몰하지 않고 차와 사람만 다니는 게 이렇게 텅 빈 느낌을 줄 줄 몰랐다.


"은수?"


낯선 중년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인도 거리를 헤매는 내 상념을 깨고 들어 온다. 김종희 일 것이 분명한데, 내가 아는 김종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길에서 스쳤더라면 서로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생소한 모습이다. 여성스러운 긴 파마머리에 정성스레 화장하고 꾸민 여자들이 넘쳐나는 이 서울 시내에서 그녀의 화장기 없는 민낯과 보이쉬한 짧은 커트 머리가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종희 선배?"

"야, 진짜 몰라보겠다. 길에서 마주쳤으면 그냥 모르고 지나쳤겠다야..."


그녀도 날 보고 같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낯설고 어색한 느낌에도 그녀는 환하게 나를 보고 웃는다. 그녀의 웃는 표정을 보니, 약간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지는 느낌이다.


"선배, 뭐 드실래요? 아직 아침 안 드셨죠? 제가 주문해 올게요."

"무슨 소리야. 인도에서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놓고. 내가 사야지. 오늘은 전부 내가 다 쏜다."


잠시 실랑이를 해 보니, 그녀가 무엇을 주장하든 그녀의 강단을 이길 도리가 없으리라는 느낌이 온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삶이 여리하던 단발머리 여대생을 이렇게 다부진 여전사로 변신시킨 것인지 정말 궁금해진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라테와 크롸상 브랙퍼스트 샌드위치를 내 앞에 놓아주고 맞은편에 앉는다.


"너 애는 있냐?"

"딸이 하나 있어요."


아직은 구구절절 이야기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짧게 대답한다.


"난 아들이 둘 있어. 근데, 남편 하곤 몇 년 전에 이혼했어. 아들들은 남편하고 살고, 평일엔 시어머니가 함께 살면서 봐주시고. 주말에 내가 애들을 데려오고... 그렇게 복잡하게 지내고 있어."


그녀는 구구절절 그녀의 가족사를 이야기해준다. 나도 조금은 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 진다.


"남편은 저와 재혼한 거고요. 딸은 남편과 전처 사이에 난 딸이에요. 시어머니가 키우시다, 저희와 인도에서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곧 고등학교 들어가요."

"그렇구나. 그래서 아직 이렇게 아가씨 같고 소녀소녀 하는구나. 난 아들 둘 낳아 키우고 나니 특전사 군인 같은 아줌마가 되더라. 남자애들 다루다 보니 소리도 지르고 호통도 치고, 그렇게 점점 사람이 세지더라고."


그녀가 여전사로 느껴지는 까닭을 깨닫는다. 왜 이혼하셨냐고 물어보려다, 그까지 내가 알 이유가 있을까 싶어 그만두려는데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너 내가 왜 이혼했는지 아냐? 결혼하면서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홀시어머니 모시고 장남 남편 수발들면서, 시동생들도 건사하고, 아들 둘 키우면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날 시골에 혼자 계신 친정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받았어. 생활력 강하고 친화력 센 아버지라, 언제나 거기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계실 거라고 착각하고 지금까지 연락도 잘 안 했던 게 너무 한스러운 거야.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암 치료를 돕고 싶어서, 몇 달만이라도 시골 가서 아버지 좀 돌봐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시어머니도 남편도 자기들 수발 안 들고 친정에 가는 걸 그렇게 못마땅해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헌신적으로 잘해준 걸 당연하게 생각하더라. 내가 진짜 더러워서 그 길로 이혼해 버렸다... "

"고생 많으셨네요. 친정아버지는 괜찮아지셨어요?"

"돌아가셨어. 시골 양반이 병원에 가는 게 무서워서 너무 오래 병을 숨기고 키운 거야. 너무 일도 많이 하고, 너무 술도 많이 드시고... 간암 말기라 손도 제대로 못써보고 금방 돌아가셨어. 근데 신기한 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상한 해방감이랄까 배짱이랄까 암튼 그런 힘이 내 뱃속에 가득 차면서, '다 덤벼' 이런 마음이 되더라. 마, 이혼 잘 해뿟다 싶더라고. 우리 소주 한 잔 하면서 해야 할 이야기를 아침밥 놓고 하고 있으니 좀 그렇다. 그쟈?"

"전 술 잘 못해요. 술 마시면서 속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안 해봤고요. 전 속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어요. 연락하는 동기 동창도 없고."


그녀가 문득 말없이 내 팔 문신이 드러난 칠부 소매 아래를 한참 쳐다본다.


"넌 언제 이렇게 문신했어?"

"날 죽이는 대신 문신하고 귀 뚫었어요. 그 악마들 만날 때, 내가 미워서."


그녀의 눈이 어느새 거울이 되어, 익숙한 같은 아픔을 반사하고 있다.


"그때 나도 어려서, 널 어떻게 도울지 몰랐어. 나는 그때 누군가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견뎠는데, 너한테도 성경 말씀을 전해 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만 단순히 생각했어."

"전 성경 말씀이 너무 아프게 찌르기만 하더라구요. 아프니까 화가 나고, 그래서 언니 편지 대부분 버렸어요. 그래서 언니를 피했고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 사람을 도울 줄을 몰랐어. 그때의 나는 너무 소심하고 겁 많고,... 그래서 내 아픔을 드러낼 자신도, 너의 아픔을 마주할 자신도 없어서 그렇게 성경 말씀만 줄기차게 앞세운 거야. 나는 못해도 성경 말씀이 어떤 기적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바라면서. 내가 정말 생각이 모자랐어. 네 마음이 감당 못하는 줄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그 짓을 계속했으니... 내가 정말 나빴다."

"그래도, 나를 정말 오래 생각해 준 유일한 분이라, 그 마음이 전해져 지금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도 그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마음에 화가 가득 차 있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제 몸을 못살게 군 거예요. 우리 다 너무 어렸죠."

"그렇게 어렸던 우리를,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서 가지고 논 놈들이 정말 나쁜 놈들이지. 네 말대로 악마지. 내가 이혼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배 째라는 심정이 되면서, 그때 '미투 운동' 붐이 일어날 때, 나도 지금 그놈들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확 드는 거야. 근데, 준비를 제대로 안 하고 충동적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내가 두드려 맞고 끝났어. 변호사 사고 재판 치르고 하느라, 겨우 잡은 직장에서도 잘리고, 시골 아버지 집하고 땅 팔아 마련한 작은 아파트 한 채 있던 것도 팔고, 지금 완전 개털 됐다. 오피스텔 월세 살고, 배운 기술이 출판일 밖에 없어서 1인 출판사 차렸는데 아직은 로맨스 소설이나 좀 팔리지 큰돈 안돼. 밤에 친구 술집에서 일하고 겨우 먹고살고 있어. 내 얼마 전에 바텐더 자격증도 땄다.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산 전업주부 경력이 바탕에 깔려있다 보니 못하는 게 없다 마. 인도 들어가기 전에 우리 술집에 함 온나. 술 잘 못하면, 술 안 넣고 맛있는 칵테일 만들어 줄게. 딸도 데려 와도 된다."


어엿한 직장이 있던 그녀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로 살기 위해 직장을 포기했고, 지금은 그녀의 의지대로 삶을 살기 위해, 결혼 생활을 포기했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의 법칙인 게 확실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접어야 할까.


"넌 인도에 계속 살 거야?"

"저도 지금 결혼생활이... 힘들어요. 남규식이 뭄바이에 왔었어요. 남편이 다 알게 되고..."


나는 정말 부끄럽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그녀에게 다 말해 준다. 결혼 이후에도 남규식을 만나왔던 이야기부터, 남편이 알게 되었고 자신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까지. 그리고 유리를 친 딸처럼 키울 마음이라는 것까지.


"너 정말 글에 대한 열망이 크구나. 그래서 네가 나보다 그놈들에게 훨씬 오래 시달렸구나... 지금쯤 남규식이 다 손을 써서 길을 다 막아 놨겠네."

"그럴 것 같아서, 제가 미리 연재 그만한다고 다 연락을 해 둔 상태예요."

"너도 참 겁이 많아서 먼저 도망가는구나."

"네. 겁이 많아요. 거절당하는 거 무서워요."

"이제 무서워하지 마라.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겁내는 거 그만 하자."


나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마음에서 곱씹는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말. 겁내는 거 그만 하자는 말...


"은수야, 너 나 믿고, 같이 일 할래?"


나는 그녀가 남규식 일당을 고발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할 것은 각오했었으나,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은 예상치 못했으므로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맘대로 인도를 떠날 수 없다는 걸 그녀에게 분명히 한 번 더 말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인도를 언제 떠날 수 있을지 몰라요."

"인도 안 떠나도 된다. 인터넷이 있는 세상이니, 네가 어디에 살 건 우리 같이 일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자고 하시는 건지..."

"너 나하고 같이 책 만들어 볼래?"


나는 한 번 더 멍해진다. 출판사 편집일 같은 걸 도와 달라는 뜻인가 했지, 책을 같이 내자고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내가 그동안 유명인들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들 중에 자기 이야기를 대놓고 못하는 사람들 익명 제보를 계속 모았거든. 고발은 하고 싶은데, 상대가 너무 유명인이거나, 너무 힘이 큰 집단이거나, 그리고 너무 오래전 일이고 증거 수집할 엄두가 안 나고, 좋은 일도 아닌데 온 세상이 다 알게 떠들 자신도 없고, 꽃뱀으로 몰리는 사례도 많고 하니... 모두 억울하고 답답해도 함부로 사건을 수면 위로 올릴 수가 없는 거지. 사실 나도 한 번 당하니까 겁나서 함부로 대놓고 싸우질 못하겠고, 너도 지금까지 조용히 살아온 이유가 있을 거고...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모두를 익명으로 해서 익명 작가의 이름으로 우리가 겪은 일을 글로 써서 묶어 책으로 내는 거지. 제목은 '말 못 한 미투' 뭐 이런 제목으로... 이 책 쓰는 일을 네가 맡지 않을래?"


말하자면 그녀의 말은 '찌라시'를 모아 책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이야기들을 엮어 책으로 쓰자는 것이다.


"이게 잘 되면, 네 소설도 책 내자."


나의 자본주의 본능은 '그게 팔릴까, 누가 사볼까' 의심한다. '무슨 돈으로 책을 만들 건가' 의혹을 품는다. 그런데 김종희의 눈빛이 그녀의 다부진 몸처럼 너무 강단 있고 확신에 차서 내 안의 의심과 의혹을 꺼내 놓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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