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의 관종 여우 16

숲의 정령

by 하트온

김종희와 헤어지고 나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책을 좀 고른 후에,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친 아난트와 유리와 합류했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인 그들을 근처 파스타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저녁을 먹이며 김종희가 제안한 이야기들을 아난트에게 들려주었다.


"저에게 좋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아난트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어느 왕국에 아름다운 공주가 태어났어요. 대부분의 아름다운 공주의 어머니들처럼, 공주를 출산하고 시름시름 앓던 왕비는 공주가 아직 아기일 때 돌아가셨어요. 공주의 아버지도 여느 왕비를 잃은 왕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슬퍼할 겨를 없이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집안의 딸을 찾아 빨리 결혼을 해야 했어요.


마침내 아름답고 자신만만한 새 왕비를 맞았어요. 새 왕비 또한 여느 새 왕비들처럼 자신이 가진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항상 자신이 최고여야 하는, 욕심이 지나친 사람이었어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공주, 전 왕비의 딸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어요. 어린 공주를 갖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괴롭히고 학대하기 시작했어요.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파도 나설 수가 없었어요. 새 왕비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 있거든요.


문제는 아무리 괴롭히고 힘들게 해도 공주의 얼굴에만 도는 밝고 아름다운 기운이 떠나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공주가 커 갈수록 그 기운은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반하고, 더 큰 사랑을 받을 뿐인 거예요. 새 왕비가 조언을 얻는 예언가가 있었어요. 예언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공주가 16세를 넘기는 순간부터 왕비님의 집안은 더 이상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집안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왕비는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공주의 16세 생일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 거든요. 지금까지는 괴롭힐 방법을 찾던 왕비가 이젠 공주를 죽일 방도를 찾기 시작했어요. 마침 이웃나라 왕자의 생일 파티가 열렸고, 공주가 초대받았어요. 공주가 성을 떠나 컴컴한 숲 속을 지날 기회를 얻은 왕비는 공주를 한껏 꾸며 마차에 태워 보냈어요. 마차를 끌고 가는 마부는 바로 왕비의 사주를 받은 공주를 죽일 병사였어요.


하지만 병사는 공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반해버린 걸요. 공주를 죽였다는 증거를 들고 돌아가지 않으면, 그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아니, 살아남더라도 과연 공주를 죽게 한 병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게 분명한 입장의 병사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공주에게 다 털어놓기로 했어요. 마차를 세우고 공주에게 왕비의 계략을 모두 이야기를 했어요. 마차가 벌써 이웃나라 근처까지 와버린 걸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잔뜩 꾸민 사람들이 모여 가식을 떠는 파티가 싫어, 궁궐을 빠져나와 산책을 하고 있던 이웃나라 왕자가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이 왕자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용맹하고 씩씩한 왕자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겁이 많고 소심한 편이었지요. 왕자가 가장 잘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재주도 탁월했지요. 그리고 거짓말도 좀 하는 편이었어요.


그대들 도움이 필요한가?

왕자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긴 채 소리쳤어요.


공주와 병사가 화들짝 놀랐어요. "누... 누구시오!" 병사가 칼을 빼들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어요.


난 숲의 정령일세. 그대들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왕자는 자신이 엿들은 말들을 다 열거하며 자신만만하게 숲의 정령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때는 사람들이 숲을 굉장히 무서워하고 신비롭게 생각하던 시절이라, 숲의 정령이라거나, 마녀라거나, 악마, 괴물이 숲에 존재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믿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공주도 병사도 홀딱 속아 넘어가서 도와달라며 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렸어요.


숲의 정령은 그들에게 목숨을 구할 방도를 알려주었어요. 가는 길에 사냥을 하여 동물의 피를 공주의 옷에 뿌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서 이웃 나라 왕자를 찾아가 그가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하라고 말했어요. 실은 왕자도 공주에게 한눈에 반해버렸거든요. 지름길을 아는 왕자는 그들보다 빨리 궁궐에 도착해 공주를 맞을 준비를 했어요. 이웃나라 왕자를 찾아간 공주는 왕자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했어요.


"그래서 왕자가 어떻게 하라고 시켰는데?"


아난트가 좋은 이야기가 생각났다며 시작한 왕자 공주 이야기를 듣다 듣다 지친 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아난트는 끝까지 잘 들어 보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세워 들어 보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왕자는 병사를 시켜 그 피 묻은 옷을 새 왕비에게로 보냈어요. 살인 사주를 받고도 공주를 해치지 않은 그 병사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왕자는 자신의 병사들 몇 명을 같이 보냈고, 일이 끝난 후엔 그를 자신의 병사로 영입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왕자가 시킨 대로 왕자가 만든 방을 마을 곳곳에 붙였어요. 공주의 얼굴 그림이 정확하게 그려진 그 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공주가 숲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보았다. 공주의 죽음을 사주한 자의 목을 베어 숲 속으로 가져오면, 평생 먹고살고 남을 금화와 보석을 주겠다. -숲의 정령 -


그땐, 숲의 정령이 금화를 놓고 갔다는 전설이 마을에 내려오곤 하던 때였거든요. 모두가 그 이야기를 믿는 분위기였어요. 공주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도 왕비가 무서워 그냥 눈을 돌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상금이 걸려있다고 하니 다들 태도가 달라졌어요. 서로 모이고 의논하고 행동을 할 사람을 찾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며칠 지나지 않아 누군가 왕비의 목을 베어 숲으로 가져왔어요. 왕자는 약속대로 금화와 보석을 숲 속에 두었겠지요. 공주도 왕비도 잃은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며 슬퍼했겠지요. 공주가 찾아가 아버지와 행복한 재회를 했을 거고요.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아니, 이 이야기랑, 김종희가 책 내자는 제안이 도대체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거지?"


나는 결국 끝이 뻔한 그의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 내 목소리에 좀 짜증이 묻어 나는 걸 어쩔 수 없다. 실컷 들어봤지만, 그냥 흔한 왕자 공주 이야기, 고리타분한 권선징악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뿐, 뭐가 좋은 이야기라는 건지. 아직 영어를 띄엄띄엄 알아듣는 유리는 말없이 피자와 스파게티를 동시에 먹으며 아난트와 나에게 번갈아 가며 눈길을 보내다가, 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는 영어 알아들으려 애쓰는 것도 지쳤는지 구석에 앉아 전화기를 들여다 보고 있다.


"잘못된 걸 보고도 모른 척하던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일 방법을 방금 말씀드린 거잖아요."

"금화를 준다고 방을 붙이라는 거지 지금?"

"그렇죠! 이제 알아들으시네!"


'장난쳐? 돈이 어딨어!'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비행기 비즈니스석까지 태워 준 잘생긴 인도 이민호에게 그런 냉소적인 비웃음을 쏠 순 없고, 최대한 표현을 부드럽게 굴려 아난트의 이야기가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글쎄... 나도 돈 없고, 김종희 쪽 자금 사정도 썩 좋은 것 같진 않던데..."

"아니, 진짜 돈을 쓰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내 이야기의 포인트를 못 알아들으셨네!"


아난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다. 유리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을 들어 양쪽 기색을 살핀다. 어떻게 인상을 찌푸려도 멋있기만 한 아난트를 유리도 나도 그냥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책 제목이나 마케팅 포인트를 그렇게 잡으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 익명의 가해자들을 수배자 취급하자는 거죠. 온 국민이 찾고 싶어 지게."

"아, 나 아난트 쌤 말하는 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유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끼어든다.


"가끔 아이돌 찌라시 같은 거 돌면, 애들이 막 돌려 보면서 하루 종일 A군이 누군지 B양이 누군지 맞추고 그러거든요. 그걸 전 국민이 하게 만든다는 거지. 내 말이 맞나 아난트 쌤한테 함 물어봐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유리의 말을 바로 통역해서 아난트에게 확인을 해 본다.


"바로 그거죠!"


마침내 아난트가 엄지와 중지가 신나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골을 넣기라도 한 듯한 몸짓을 한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


나는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제 못 알아듣는 사람은 나 혼자다. 아난트와 유리가 둘이서 열심히 번갈아 가며 설명을 해주는데도 모르겠다. 이 말을 김종희는 알아들을까 싶어 나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그녀는 당장 그녀가 일하는 술집으로 모두 달려오라고 재촉한다.




김종희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술집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웬만한 집 거실 사이즈 밖에 안돼 보이는 공간 한 중간에 긴 아일랜드 바가 있고, 바의 뒤쪽은 부엌, 바의 앞쪽은 4개의 테이블 밖에 없는 아주 작은 가게였다.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한 테이블 밖에 손님이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이 우르르 들어가 아일랜드 바를 차지하고 앉으니 가게가 꽉 차는 느낌이 든다. 김종희와 그녀의 친구가 반갑게 맞아 준다. 그녀의 친구는 이미 김종희에게 들은 게 많은지 이 사람들이 다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들의 눈은 온전히 오로지 아난트에게 쏠려있을 뿐이다.


"와, 내 평생 실물로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겼다."

"내가 이 술집 열고 영접해 본 사람 중에 젤 잘생겼어! 완전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야!"


김종희와 그녀의 친구가 눈에 하트를 잔뜩 그린 채 한 마디씩 한다.


"통역해 줘요?"

"아냐 아냐... 하지 마..."


김종희와 그녀의 친구는 수줍어 까르륵 거리며 손사래를 치고 난리다. 역시 잘생긴 인도 이민호는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을 기뻐 춤추게 한다.


"너하고 귀여운 딸내미는 무알콜 스트로베리 데커리, 그리고 잘생긴 오빠는 피냐 콜라다..."


김종희가 나와 유리 앞에 딸기로 장식을 한 핑크색의 칵테일을, 아난트 앞엔 파인애플과 종이우산으로 장식한 크림색 칵테일을 놓는다.


"아까 전화로 한 얘기 좀 다시 해 봐. 그때 막 가게문 여느라 정신이 없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내가 아난트가 해 준 왕자 공주 이야기를 해주고, 유리가 덧붙여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포인트를 쭉 설명해 주었다.


"마케팅 아이디어 괜찮은데!"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김종희의 친구가 뭘 아는 눈빛으로 김종희보다 먼저 맞장구를 치고 나온다.


"얘가 마케팅 전공이라 감이 빠르네. 민아야, 그럼 책 제목을 '놈들을 수배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낫나?"

"그리고 책 표지는 수배자 현상금 공지문처럼 넣고!"


김종희와 그녀의 친구는 뭔가 아난트의 이야기에서 확실히 잡히는 무엇이 있는지 둘이서 아이디어를 주고받느라 신난다.


"이 이야기를 여기 아난트 씨가 해줬다고! 이 친구 잘생기기만 한 게 아니라 천재네 천재."

"정말, 나 이런 타입 너무 좋아. 잘 생기고 생각도 현명하고! 인도 남자들 다 이렇게 생긴 거야? 종희야 우리도 인도에 가서 살까? 거기서 술집 열고?"

"내가 너처럼 훌쩍 떠날 수 있는 입장이냐? 아직 애들에 대한 책임이 있잖아. 나도 인도 가고 싶다 진짜."


인도 남자가 다 그렇지 않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지만, 그런 말을 해 줄 틈을 주지 않는다. 아난트가 자길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보낸다.


"통역해드려요?"

"아니, 아니."


그들은 또 나이와 외모에 걸맞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거듭 손사래를 친다.


"왕자 공주 이야기 너무 멋진 이야기였다고, 마케팅 포인트 잡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만 전해."


내가 그대로 전하자 아난트는 활짝 웃으며, 어디서 배웠는지 손가락 하트를 꺼내 보이고, 그걸 본 아낙 둘이 또 깔깔거리며 자지러진다. 인도에 가지 말고, 여기서 아난트에게 한국어를 열심히 가르쳐 연예인으로 데뷔시키고 소속사 대표 겸 매니저나 할까 생각이 스친다. 그게 훨씬 빨리 돈 버는 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난트의 아버지가 허락할 일은 아니겠지만.


"저기... 제 이야기도 넣어도 돼요?"


갑자기 유리가 손을 들며,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다.


"저도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어요."


분명 무알콜 칵테일이라고 했는데, 유리의 두 볼이 술을 잔뜩 마신 사람처럼 발갛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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