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쉴 곳
유리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겹겹이 체한 것을 게워내듯 제 마음을 쏟아 놓는다. 소녀가 제 몸속에 어떤 피가 돌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리는 듯한 섬뜩함과, 곁에서 다 보면서도 어찌 도와줄지 모르겠는 난감함이 내 가슴을 꽉 움켜쥔다.
"전 피아노가 좋았거든요... 피아노 선생님도 좋았어요. 자상하고... 아빠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피아노 선생님이 저를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거라고 믿었어요. 딸처럼 사랑하면 그렇게 만져주는 것인 줄 알았어요...."
유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아이다. 강남 8 학군에서 아들을 키우며 교육열로 무장 단련된 할머니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잘 나가는 레슨 교사를 수소문 끝에 찾아냈을 것이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곁눈질하며 눈을 내리까는 모양새가 불쾌한 기운을 풍겨도, 미국 물 먹은 독특한 선생님이려니, 천재 피아니스트라 그러려니 애써 지워내고 좋게 평가하려 했을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라 집중을 못하고 선생님 눈밖에 날까 봐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고 선생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아이의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입시켰을 것이다. 4살 아이는 사랑과 추행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부모의 사랑과 스킨십 속에 크지 않은 아이는 능력이 더 없다. 할머니 혼자 키우는 아이라는 것을 가해자는 놓치지 않고 간파했을 것이다. 피아노 선생님이 옷 안에 손을 넣어 만져주는 것에 유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버렸을 것이다. 추행을 당하면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갑자기 심한 사춘기가 찾아온 건 추행을 자각한 소녀의 당연한 항거였다. 그녀가 학교도 레슨도 다 그만두었던 것,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인도행을 택한 것, 할머니를 떠나 모자란 부모라도 부모를 택한 것, 모두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무너져내린 세상에 대한 신뢰, 갑자기 맞닥뜨린 혼란 앞에서 아이가 이 정도 버텨준 것만도 기특한 일인 것이다.
"할머니에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런 피아노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린 나를 그런 선생님한테 보낸 할머니에게 화가 났는데, 할머니는 좋지도 않은 이야기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고, 그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웠다는 사실을 잊으라고 했어요."
자신이 겪고 느껴 온 모든 것에 대해 입을 닫고 기억에서도 지우라고 벽을 치는 할머니 앞에서 아이는 얼마나 낙담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게 다 아빠 잘못이에요. 아빠가 없으니까 내가 구분을 못한 거예요. 진짜 아빠가 해 주는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아빠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애는 잊고 출세길만 닦고, 새장가가고... 아빠가 좋아서 보고 싶어서 인도에 오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사실은 할머니하고 싸우다가, 할머니가 지쳐서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 죽겠다. 너 자꾸 이럴 거면 네 아빠한테 가서 살아'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런 말을 기다려온 것처럼 생각되면서 가슴이 시원해졌어요. 그래서 가겠다고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 평생 괴롭히며 살겠다는 복수심 같은 마음도 좀 있었어요..."
유리가 제 아빠를 '마마보이'라고 경멸하며 무시하는 말들이 모두 제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유리는 아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아빠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고, 그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게 문제였다는 걸 애가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 선생님이 수많은 아이들을 성추행했던 것이 수면 위에 올라왔고, 결국 그 선생님은 소송당하고 감옥에 가 있다고 한다. 이미 법적인 처벌은 내려졌으니, 그 사람을 대중 앞에 수배하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라고 한다.
"제가 겪은 일들을 내 속에 품고 숨기기만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같이 피아노 배우고 같은 일 당했던 아이들끼리 모이고, 술도 마시고 그랬어요. 할머니하고 크게 싸우고 가출해서 친구 집에 가서 자기도 하고,...."
할머니를 잘 따르는 모범생이었던 유리가 아무리 사춘기가 왔다지만 가출하고 술마시고 난리라는 게 참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었다. 모든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엄마 만나고 제가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엄마의 어릴 때 가정환경, 엄마의 아픔,... 모든 게 이상하게 저에겐 위안이 되었어요. 나하고 많이 닮은 사람을 만난 것 같고, 진짜 내 엄마같기도 하고."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엔가 털어놓을 데가 필요했던 것임을 이제 확실히 이해를 한다. 이건 할머니도 아빠도 감당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아픔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이에겐 필요했다. 그래서 유리는 나를 붙잡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겪어 온 모든 일들, 어른들의 복잡하고 추잡한 이야기까지도 쉽게 이해하고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나를, 내 과거를 품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아픔이 내가 아이 안에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내 아픔이 벌려놓은 내 마음자리는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가 된 것이다. 내 문신에서 내 피어싱에서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쉴 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 아이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의 편인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의 상처만이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엄마와 의붓딸 이전에 동지인 것이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아난트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톡톡 친다. 내가 아난트 선생님에게 말해줘도 되냐고 하니 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난트에게 유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난트의 사슴눈이 한없이 슬퍼지더니 결국 눈물이 맺혀 툭툭 훌러내린다. 김종희와 그 친구도 눈시울이 빨개져선 뒤돌아 서있다. 이 어린아이가 당해온 일 앞에서 모두 할 말이 없어진다.
약자의 몸을 이용하는 일, 그리하여 약자의 정신을 괴롭게 하는 일, 약자가 평생 수치심과 혼란 속에 살아가게 되는 일. 유리의 이야기를 듣고 왜 내 몸이 불판 위의 생선처럼 미친 듯이 틀어대기 시작하는지 모를 일이다. 내 몸속에서 오랜 시간 누르고 눌렀던 무언가가 엉엉 터져 나오며 숨도 쉬지 못하고 오열한다. 내가 저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울고부니, 유리가 놀라 내 목에 제 팔을 감아 온다.
"엄마 울지 마요. 엄마 울지 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유리는 다시 재잘재잘 떠드는 밝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특히 내가 울어 준 것이 그녀에게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진정으로 이해한 느낌이어서 뭔가 가슴에 얹혀 있던 게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자길 온전히 이해하는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걸 이해했다고 했다.
"진짜 내 이야기가 책 나오면 좋겠다."
"네가 먼저 한 번 쭉 써봐. 그런 후에 엄마가 봐줄게."
유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곤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댄다. 나를 믿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아난트는 우리가 선물한 사진첩을 내내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아난트에게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어 주자고 여행 전부터 미리 계획을 했었다. 아난트가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돌아다니는 모습부터,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는 미용실에서 아이돌 스타일로 스타일링하고 찍은 사진까지 아난트가 한국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한 권의 사진첩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유리가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주었던 덕분에 많은 순간들이 저장이 되었다.
"고마워요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을 선물 받았어요. 한국 여행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책 나오면 우리 같이 또 한국 가요. 다음번엔 겨울에 와서 스키장에도 가 봐요. 눈썰매도 타고요."
유리는 벌써 다음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다. 눈이 오지 않는 뭄바이에 사는 아난트에게 눈 구경을 시켜주고 싶은 모양이다.
"꼭 그러자."
아난트는 손가락을 걸며 진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함께 여행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 세 사람은 뭔가 전우애 같은 걸로 똘똘 뭉쳐 있는 기분이 든다. 이게 유대감이라는 걸까. 이상하게 든든하다. 결혼하고도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을 이 어린애들과 함께 있으며 느낀다. 일상적으로 가슴에 깔려있던 불안하고 비참한 느낌이 많이 옅어졌다는 걸 깨닫는다. 함께 싸우는 전우 동지가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인 줄 몰랐다. 마치 군대에 입대하고 수많은 전우가 생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리와 나는 딱 한 달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쓰기로 했다. 아난트가 자기 집안 건물 오피스 하나를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한쪽면에 큰 유리창이 있고,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벽에 붙어 있는 딱 글쓰기 좋은 심플한 공간이었다. 유리가 수업을 간 사이에 나는 여기 앉아 조용히 글을 쓸 수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내가 잠시 아난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유리 혼자 글을 쓰고 숙제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함께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같은 한식을 해 먹었다.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 한 달이 되었고, 유리도 나도 각자 맡은 글 분량을 다 채웠다. 완성된 원고를 이메일로 김종희에게 보내고 우리는 그 날 잡채에 미역국에 생선까지 굽고, 푸짐하게 음식을 해서 우리끼리의 축배를 들었다.
8월 말부터 유리는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한 달여 정도밖에 남지 않아, 아난트가 조금 더 신경을 써 주기로 했다. 나는 유리를 잘 먹이는데 신경을 썼고, 남편은 남편 대로 아이를 데리고 외식을 시켜주고 시간을 보내려고 애를 썼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유리가 기숙학교에 들어가기 며칠 전, 남편이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유리가 아난트와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남편의 사무실 앞 카페로 찾아갔다.
"내가 승진이 된 이유 알아?"
남편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유리 선생님, 예전에 우리 집에 난리 났을 때, 유리가 불러서 우리 집에도 왔던... 그 선생 누군지 알아?"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 선생이 므케시 집안 막내아들이더라고. 그 사람이 날 자기 집안 담당 관리자로 추천해서 내가 승진된 거였어."
뭔가 남편이 갑작스럽게 승진을 해서 월급이 거의 두 배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긴 했었다. 리더십을 인정받을 만한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저도 아는 일이어서 승진 소식에 남편 스스로마저도 매우 놀라워했었다. 남편이 이번 일 겪고 독하게 마음먹었나 한편으론 생각했었는데, 여기까지 아난트의 비즈니스석 같은 입김이 작용한 거였다.
"내 위치가, 인도 투자자 고객 관리 책임지고 전담하는 역할이거든. 특히 므케시 그 집안이 제일 큰 덩치 고객이라, 거의 그 집안만 잘 관리해도 반은 가는 일이야. 그 집에서 돈 빼면 바로 잘리는 위치이기도 하고... 근데 그 집에서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초대를 했어. 원래는 사장 가족이 초대를 받던 자린데... 부담스럽네... 지금 우리 사이도 이런데..."
남편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걱정 마, 내 역할은 잘할게."
"인도 높은 계급 사람들한테 뭐가 예의에 바른 거고 아닌지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내가 남의 문화를 익히고 소화하는게 좀 자신이 없어... 좀 도와줄 수 있어? 유리 선생한테 좀 물어보던지."
"알았어. 걱정 마."
아난트한테 물어보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남편은 너무 감당하기 힘든 큰 일을 시켜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날 돕는 게 마음 편치 않겠지만, 일단은 내가 돈을 벌고 직장생활을 잘해야 모두가 잘 되는 거니까. 같이 비즈니스 한다 마음먹고 도와줬으면 좋겠어."
부부 관계가 힘든 상황에서 자길 도와줄 명분이 없어 힘들까 봐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할지를 설교하고 있는 남편이 한심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 해 도울 거니까 걱정 마."
"너 혹시 나 하고 다시 잘해 보고 싶어서 노력하려고 이렇게 희생하는 태도로 나오는 거야?"
내게 너무 쉬운 일인 걸 모르는 남편이 이걸 희생이라 부르는 게 웃기지만 꾹 참는다.
"아니, 유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거야. 유리는 내 딸이기도 하니까."
"야, 웃기지 마. 유리가 무슨 네 딸이야. 너 지금 나한테 매달리는 거네."
남편은 지금 유리 엄마라고 자처하는 나를 비웃고 있다. 빈정이 상하지만 아무 말 않는다. 싸우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집도 아닌 곳에서. 그리고 이 결혼에 대한 내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별 다른 대꾸를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냐. 당신이 마음 정하는 대로 따를 거야. 하지만 내가 유리 엄마라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애 붙잡고 늘어지는 거 맞네."
"그런 거 아니래도. 이혼해도, 떨어져 살아도, 내가 애 엄마로서 할 의무는 지킨다는 거지."
"네가 무슨 의무가 있어. 친엄마도 아닌데."
남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친엄마도 아닌데'를 '친엄마도 아닌 주제에 언감생심'이라고 내 자격지심이 확대해석하는 바람에 몹시 기분 상하고 짜증이 밀려오지만, 유리와 나 사이를 남편의 머리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리라는 깨달음이 와서 그냥 꾹 참기로 한다.
"어쨌든, 당신 뜻에 따를 거니까. 우리 문젠 열심히 생각해 보고 답 줘. 당신을 위해 결정해. 내가 매달릴 거라 부담은 절대 갖지 말고."
"넌 나한테 마음 떠난 거냐, 아님 사람한테 매달릴 줄을 몰라서 이러는 거냐."
이 남자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매달리지 않겠다는 분명한 말을 원하는 것아 해 주니, 왜 저런 상처 받은 표정을 짓는지...
그의 상처 받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로맨틱한 남녀 간의 감정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계속 속여온 입장이라 가족이라 주장할 수도 없지만, 10년을 함께 얼굴 맞대고 살아온 정 같은 건 분명히 있다.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내 마음이 뭐가 중요해. 당신 마음이 편한 게 중요하지. 그러니 내 마음은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안 써. 날 향한 네 진심이 어떤지 알아야 내가 결정을 하지."
내 진심이 뭘까.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아무래도 이 결혼은 결국 나한테 달린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