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첫사랑에게 쓰는 편지

**이에게

by 하트온
2000년대 초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 어느 초여름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어떤 순간 글 쓰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어 써 내려간 편지글입니다. 대학원 시절에 쓰던 노트들을 버리려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글을 브런치에 옮겨 놓고, 노트는 버립니다.


누구에겐가 글을 쓰고 싶은 저녁이다. 실로 오랜만에 이런 조그만 짬이 났다. 나이를 먹고 여유가 없어진다는 어른들 말이, 삶에 쫓겨 글을 쓸 여유 같은 건 더더욱 없다고 하던 어른들 말이 이런 것인가 보다. 시간이 갈수록, 할 일이,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만 가고, 마음을 어딘가에 쏟아부을 여유란 것은 없어지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보다.


내가 널 처음 보았던 것이 14년 전 이맘때였던가 싶다.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내 기억 속에서 많이 희미해졌지만, 너를 알게 된 후 가슴앓이를 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더라. 그건 뭐랄까, 기억이라기보단 오래전 일이긴 해도, 그때로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밀봉된 상태로 완벽하게 보관된 무엇이랄까.


나는 그 밀봉한 상자를 열어볼 수가 없었다. 특히 너와 연락이 끊긴 후, 한참을 나는 꾹꾹 묻어 두어야 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의 내면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어. 마음이 조그만 흔들림에도 무섭게 동요하며 회오리 칠 것만 같아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 인생 자체가 너무 미지와 혼돈의 상태였어. 너를 알게 되고 겪었던 내 감정이나 경험들을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아서, 내 주변의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없었고, 그만큼 주변의 어떤 도움도 설명도 얻을 수 없었던 철저히 고립되었던 나의 감정 상태는, 도무지 다룰 길이 없으니 그냥 밀봉해서 묻어둘 수밖에 없었어.


알 수가 없는 것, 불확실한 것은 두려움이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떠났던 것도 - 물리적으로 그곳을 먼저 떠났던 것은 너였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에 너를 떠나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 내가 내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어. 너무 불안정해서 더 이상은 부여잡고 있을 수가 없었어.


한창 푸르고 건강한 청년의 시기였음에도, 그때의 내 마음이 건강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지금 깨닫는다. 네가 가끔 그랬었지. "제발 화를 내. 내가 잘못하면 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겠어." 내가 화내지 못하는 것을 너는 이상히 여겼거나, 답답하게 여겼거나, 어쩌면 지금쯤은 기억도 생각도 안나는 모습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것이 최근까지 나를 묶고 있던 올가미였고, 이렇게 성인이 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내가 왜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것이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데 얼마나 큰 장애인지,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 것인지 알게 되었지. 지금에야 나는 아기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듯, 건강하게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런 것들을 깨달아 가면서 나는 가끔 생각해. 내가 너를 만났을 때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야.


그때의 나에겐, 네가 너무 소중해서, 어쩌면 화를 낼 줄 아는 아이였대도, 화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몇 번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너를, 두 시간도, 어떨 땐 네 시간도 넘게 추위에 입술이 새파래져가는 것도 모른 채 기다리곤 했었어. 너를 만나고 싶은 강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기도 했고, 네가 나를 길에 세워두고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마냥 기다리면서 스스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지. 크나 큰, 너무 몰랐던, 순진했던, 순진하기에 더 강했던 열정이 불살라 까맣게 태워버리고 있던 내 마음. 까맣게 재가 된 마음은 커다란 실망으로 변했고, 실망의 검은 재는 분노로 변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부서져 가던 내 마음 - 한 번도 너에게 표현한 적도 없으면서 - 은 내 존재 가치에 대한 혐오로 변하고 있었어. 소중하지 않은 존재, 너에게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결정 내리고, 너를 떠나겠다고 매일 밤 결심하는 일기를 쓰고 있었어. 그렇게 결심하면서도 나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할 수 없어, 너에게 전화를 하고 만나기도 했지. 내가 떠날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고 말이야.


나는 내가 널 떠나도 네가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내 감정만 앞설 뿐, 서로의 마음을 알 길도, 자신의 마음을 알릴 길도 찾지 못했던 그런 상태였기에, 너무 어려서 뭘 모르는 그런 시기였기에 네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선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너도 나를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짐작해 볼 뿐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걸 굳게 믿었다면, 내 마음은 조금은 덜 요동했을까. 너무나 불안정한 상태의 나였어.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한 달여 동안 너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후의 어느 날 네가 찾아왔었지. 정말 화가 난, 실망 가득한 너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나. 난 정말 내 마음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대학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너에게 전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실 나는 너를 잊을 수 있었다는 게 기뻤어. 너를 줄곧 내 머릿속에 두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자꾸 너에게 달려가고 싶은 감정이 나로선 감당할 수 없었기에, 너를 잠시 잊을 만큼 대학 생활이 한 사람을 향한 집착을 분산시켜 주는 것이, 내 불안을 잊게 해 주는 것이 정말 고마울 정도였어.


너는 그다지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너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거나, 내가 대학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타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 네 동창을 시켜, 나를 캠퍼스에서 상당히 떨어진 조용하고 한적한 찻집으로 불러 냈었지. 한 달 동안 우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네 말을 듣고 마음이 무너질 듯 슬퍼져서 나는 엉엉 울기만 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슬프다. 어쩌면 너도 많이 아프고 불안정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 동창이 내 눈물을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들었기에, 말이 돌기 시작했지.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를 사귄 여자애. 대학 들어가면서 대학 못 간 남자 친구를 버리고 변심한 여자애. 내 마음이 불안정했던 만큼, 소문이 내 귀에 더욱 크게 느껴졌지. 대학에 입학하고 새롭고 신났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대학 생활은 그렇게 숨길 것 많은 불안으로 얼룩져 갔지. 나는 정말 내 속의 마음의 짐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갈망했기에, 갈망이 심했던 만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군중의 무심한 한 마디에도 마음에 생채기가 크게 나곤 했었어.


힘들었었어. 나의 대학 생활. 공대에 몇 명 안 되는 여학생 중 하나였던 나. 눈에 띄는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그곳 환경의 특성상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부풀려진 소문들이 무성하게 자라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그곳에서, 늘 마음 쏟아부을 곳을 찾아 방황하던 나. 마음을 터놓고 믿을 친구 하나 없던 나. 그런 불안정한 나를 소유해보고 싶어 다가오던 어리고 미성숙한 남자들. 거절감에 자존심 상하면 쉽게 안티로 돌아서던 사람들.


나는 늘 나를 숨기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곤 했어. 내 모습이 하루아침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서, 사람들이 나를 봐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백일몽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견뎠어. 아버지가 무서워서 내가 선택했던 공대를 끝까지 그만두지 못하고 갖은 고생 끝에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어느 날, 네가 찾아왔었지.


군복 차림의 네가 날 찾아왔던 그 밤, 가로등 불빛과 어둠이 정신없이 어룽진 밤의 공간을 허우적거리며 네가 기다리고 있던 집 근처 커피점으로 뛰어가던 그 순간. 예전에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과 다름없이 내 심장은 심하게 고동치고 있었고, 격해진 감정에 목이 메일 정도였어.


하지만, 정작 너를 마주 대했을 땐,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솔직히 보일 수 없었어. 우리의 말이 어떤 순서로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너는 군 제대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었지. 그리고 함께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떠나자는 말을 했었어.


그 전에도, 너는 섬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너무 막연한 느낌이 들었어. 네가 충동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의미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막았을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너에게 차가운 거짓말을 남기고 돌아서게 했을까. 곁에 있을 때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따뜻한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 너는 결코 내 아버지가 인정하고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 함께 하는 미래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 같은 막막함? 불확실함?


난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어. 내 솔직한 감정을 보일 자신도, 너를 다시 내 인생에 끌어 들일 자신도 없었어. 내 인생은 족쇄가 채워진 인생이었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족쇄, 시시때때로 내 숨통을 조이는 그 족쇄를, 너는 결코 함께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너에게 너무 늦었다고, 약혼자와 함께 곧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했어. 군을 제대하고 나오면 나는 한국에 없을 거라고 말하며, 다신 날 찾지 말아 달라고 철벽을 쳤지. 그 날, 네가 보여준 네 간절한 마음에 감동을 받았고, 설레고 기뻤음에도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정말 자신이 없었어.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신 널 볼 수도, 너에 대해 들을 수도 없었어. 난 곧 모든 것을 떠나버렸거든. 그래, 지금은 머나먼 곳 미국 땅에 와 있어. 무엇이 날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 난 사실 잘 모르겠다. 왜 이리도 멀리 떠나가야 했는지. 너로부터 이렇게 멀리.


넌 가끔 날 생각하겠지. 내가 널 가끔 생각하듯이. 미국으로 오면서, 너에 관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더군다나 미련이 가득 남은 첫사랑의 기억은 심장 한가운데 각인이 된 것처럼 남는 무엇이더라. 내가 너무 어렸고 몰라서 마음껏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했던 기억. 족쇄에 갇혀 솔직한 선택들을 해 보지 못했던 기억. 가 보지 못한 길, 완성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


이런 기억들이, 지금 막 서른 즈음에 도달한 나에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밀봉해서 묻어 둔 감정들을 오늘 이렇게 꺼내서 들여다보게 될 줄 몰랐어. 나 혼자서 감당하긴 다소 큰 감정이라,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쓴다.


넌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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