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라는 감정의 역할

부정적인 감정도 소중하다

by 하트온

다시 찾아온 우울


감정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느끼지 말아야지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 스며드는 우울한 감정을 부인하고 거부하면 할수록, 이 감정은 수치심과 비참함이라는 친구들까지 동반해 나를 흠씬 더 우울 깊이 젖어들게 할 뿐이다.


밤에 잠들기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게 만드는 이 익숙한 감정을 처음 제대로 맛본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반복될 뿐인 관계와 감정의 패턴 속에서, 공대 4년 마음 디딜 자리 없는 고립감에 지쳐,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일어나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고, 졸업을 하고 대학원까지 갔으니. 나의 강인한 생존력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건 내 의지의 생존력이라기 보다, 후퇴에서 돌아갈 자리, 비빌 언덕, 받아 주고 돌봐 줄 사람이 없는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 우울감을 제대로 맛 본 이후엔, 쉽게 도지는 만성 위염처럼, 익숙하게 아릿한 감정이 수시로 쉽게 찾아들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도, 미국에서 취직을 한 이후에도, 결혼을 한 이후에도,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도... 어느새 잘 알게 된 떫은 감 맛처럼 입안을 불쾌하게 가득 채우는 텁텁한 감정의 맛이 찾아왔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깊은 좌절을 느낄 때마다 찾아오는 것 같았다.



우울감의 본질


나는 그 치 떨리는 좌절감, 우울감을 다시 마주하지 않기 위해, 어느 날 나를 창밖으로 던지는 느낌으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던져 버렸다.


다시 찾아온 우울감을 마주하면서, 주변 상황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중년에 이른 내 몸이, 내 신체 기능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젊음과 활력을 손에서 차마 내려놓지 못하는 그 마음이, 끝내 또 그 좌절의 우울을 불러오는 것을 본다. 내가 아무리 '나 괜찮아. 몸이 그럴 수 있지. 누구나 겪는 거고 인생이 그런 거지.'라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일단 감정이 와서 자리 잡은 이상, 없다고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괜찮지 않다고, 아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 몸이 말해주고 있다. 우울감이란 내 몸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위급한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너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야. 네가 이 변화를 잘 이기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왔어.


지금까지 거부하고 피하려고만 했던 그 감정은 사실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바탕이 될 메시지를 전하는 '사신'이었던 거다.



우울감과의 협력


예전처럼 우울감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거나, 조급하게 떨쳐내려고 난리를 부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 이 우울감이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친구라는 걸 알았으니, 천천히 그와 상의해 보려 한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


내 삶에서 잘라내거나 덜어내야 하는 것이 있는지.

힘들어도 견뎌내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 있는지.

다르게 마음먹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는지.


나를 돕는 이 '사신'을 잘 대접하고, 그의 현명한 지혜의 말을 잘 귀담아들으면서,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이혼 부부 같은 관계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가능한 안 보면 마음 편하고 좋지만, 마주쳐야 하면 쿨하게 협력하고 의논하여 할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관계.



잘하고 있어


그가 말해준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고. 깊은 우울의 바닥에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나를 쉽게 우물에서 끌어올릴 수 있기 위해, 설치해 둔 장치들이 많이 있다고 말해준다.


너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잖아.

너는 너를 설레게 하는 글을 쓰고 있잖아.

너는 치유를 많이 경험했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잖아.

너는 매일 운동 열심히 하면서, 심신을 잘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그래, 나는 잘하고 있구나. 잘하고 있는 거였어. 이 만큼 온 것도 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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