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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어선 아시안 혐오 범죄, 우리의 내면은 괜찮나?

내재화된 인종차별에 대하여

by 하트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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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태생 중국인



미국 공공 도서관에서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때, 그해 문학상을 있는 대로 휩쓸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며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의 작품이 있었다. 바로 진양(Gene Yang)의 미국 태생 중국인 (American Born Chinese)이라는 책이다. 형식은 만화인데 엄청난 문학적 깊이를 가진 소설 작품으로 평가되어, 청소년 권장도서로, 북클럽 추천 도서로 각광을 누렸던, 지금도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빠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아시아계 학부모와 청소년들에게마다 부지런히 이 책을 권했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계 어린이, 진왕의 어린 시절 일상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나가시고, 어느 중국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저렴한 어린이 집에서 다른 중국 어린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자란다. 진왕이 공립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 차이나 타운에서 떨어진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간다. 새 동네 새 학교에서 진왕은 자신이 유일한 중국계 학생이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어린 마음에 쏟아진 인종차별, 인종 혐오의 파편 조각들이 그의 가슴에 무수히 박히고,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어 백인 여자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백인 같은 외모가 되고 싶고, 백인 친구 집단에 속하고 싶은 열망이 그의 정체성을 장악하고 무자비하게 갉아먹기 시작한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근본을 상기시키는 중국에서 금방 온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다. 미국 문화 속에서 내재화된 중국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색안경을 빼고 동족을 바라보기 힘들다. 영어를 못하고, 문화를 모르고, 매너 없고 촌스러워 보이는 본토에서 금방 온듯한 중국인들을 볼 때 한없이 화가 나고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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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혹은 미국에서 오랜 세월을 산 아시안계 미국인들의 가슴 깊이 내재화된 인종차별의 모습이 어떤지를 너무나 정확하게 잘 그리고 있다.



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


한국에서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느낌과 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 무척이나 달랐다. 미국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정말 이상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만나는 서로를 귀하게 생각하고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인데, 한국인 망신을 다 시킨다며 서로를 비난하고, 차별하고, 험담하고, 소문내고,... 조금의 흠도 참을 수 없어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화를 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분열된 작은 집단들 - 1세, 1.5세, 2세, 옛날에 온 교포, 최근에 온 유학생, 몇 년 살다 떠날 주재원, 포닥, 사업하는 사람, 월급 받는 회사원,... - 이 서로를 혐오하는 정도가 필요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먼 타국에서 정말 이렇게까지 서로의 신분, 출신, 영어실력, 사는 형편을 따지고 분열할 일인가?


미국에 와서 인종 차별을 당하고 조롱당한 한국인들은 차마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에릭남이 타임지 기고글에 썼던 표현대로, 타국 땅에서 이만큼 사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인 내재화된 인종차별이, 자신의 내면에서 곪아 터져 그대로 동족에 대한 인종 혐오로 발전한 것이다. 인종 차별자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동족 한국인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식하고 개념 없는 미국 사람들에게 당한 화풀이를 나보다 더 미국 문화를 모르는 같은 한국인에게 풀고 있었던 것이다. 혐오가 낳은 혐오,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한 혐오가 마음을 잠식한 것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인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까내리고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인 족속이라고. 여기서 만나는 한국인들을 절대 믿지 말라고.


내가 미국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내내 불편했던 - 보이지 않는 어떤 잣대에 재단 당하고 눌려지는 듯 했던 - 어둡고 무거운 공기의 이름이 동족끼리의 '혐오', '차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떤 일이 생겨도, 미국인이 잘못한 게 아니라, 한국인이 잘못한 것이라고 미국인의 입장을 편들고 계몽하고 가르치려 드는 한국인이 여기저기 넘친다. 이름을 영어로 바꿔라. 음식 먹을 때 입술을 꼭 붙이고 소리 내지 말고 먹어라. 아침에 한국 음식 먹지 마라. 향수를 뿌리고 한국인 냄새 풍기지 마라. 한국 사람 이런 모습 저런 모습 꼴불견이다. 미국에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물론 인종주의, 서열주의, 집단주의에 갇혀 있는 사고방식에서 마음을 열고 더 성장해 나가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도 더 갖추고, 매너도 더 갖추어야 할지 모른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상대방도 배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돌아 봐 주고, 믿어주고, 안쓰러워해 주는 마음보다, 서로에 대한 혐오의 마음이 컸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너무 엄격한 잣대를 서로에게 들이대 온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남이 품은 혐오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내 안의 혐오부터 깨끗이 씻어 낼 필요가 있다. 그런 후에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1: <American Born Chinese> 표지 이미지

이미지 2, 3, 4: <American Born Chinese> 내용 중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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