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넷플릭스 드라마, 길모어 걸즈 (Gilmore Girls)
길모어 걸즈는 미국에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7 시즌 153부작에 걸쳐 인기리에 방영했던 드라마다. 나는 그즈음 박사과정, 커리어, 힘들었던 첫아이 임신과 출산으로 정신없는 시기를 보내느라, 길모어 걸즈라는 드라마가 방영하고 있는 줄도 몰라, 이 재밌는 드라마를 통으로 놓쳤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 있는 것을 보고, 보기 시작했는데, 뒷북 뒷북 이런 뒷북이 없지만, 흡족히 재미있다. 20년 전의 패션에 주인공들은 공중전화와 폴더폰을 번갈아 쓰는데도, 드라마는 전혀 촌스럽지 않고 멋지다. 출연자들 모두가 매력적이고 공감 가고, 스토리 전개도 자연스럽기만 하다.
나는 첫 장면부터 와락 빠져드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16세에 아이를 낳았던 32세 엄마 (로렐라이)와 16세 딸(로리) 모녀다. 첫 장면은 이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가족, 얼핏 보면 자매 같은 이 모녀가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끼니를 때우는 장면이다. 처음부터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카페다. 이 카페는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배경 1의 느낌이 결코 아니다. 주인공들이 따뜻한 불빛 가득한 카페 공간에서 밝게 웃는 모습을 카메라가 줌 아웃하며 잡아 내는 방식에서, 뭔가 따뜻하고 안전한 정서적 안식처 같은 느낌, 카페 자체가 주무대인 느낌이 풍겨 나온다.
카페 사장 (루크)는 어머니 없는 환경에서 아버지 손에 큰, 결국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신 상황에 처한 스스로를 단단히 다지며 삶을 일구어온 로렐라이에게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는 그녀의 남사친이다. 로렐라이 또한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기르며, 꿋꿋이 자신의 삶을 세워온 강단 있는 사람이라 둘은 많이 달라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았다.
길모어 걸즈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가진 사람이 없다. 각 사람, 각 가정의 삶을 들여다보면 빈 구멍이 가득하고, 빈 구멍을 메우려는 갈망과, 옳은 선택을 하고 싶은 이성과, 마음대로 살아 움직이는 감정이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 법칙들과 좌충우돌하며 실수와 실패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삶에도 인간관계에도 능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서툰 방법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돌보며 나아간다.
그녀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
지금 막, 시즌 3에 들어섰는데, 늘 장난기 많고 쾌활한 로렐라이가 처음으로 루크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렐라이는 로리의 친아빠 (크리스토퍼) - 16세에 임신하게 했던 남자 친구, 임신을 알고 바로 로렐라이에게 청혼을 하려 했지만 뭔가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결국 로렐라이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셈이 되었다. - 와 이런저런 사연 끝에 다시 연인 관계가 되고 모든 것이 완전해지려는 듯했었다. 로리와 로리의 친엄마 친아빠, 세 사람이 완벽한 가정을 꾸릴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는 크리스토퍼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무산되어 버렸다. 크리스토퍼는 애초에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마음먹었었지만, 그녀의 임신을 알게 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자를 저버릴 수 없는 입장임을 깨닫게 되고 울며 겨자 먹기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로렐라이는 마침내 딸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리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부모님에게 사실을 고해야 했다. 실망으로 역정을 내고 말다툼하는 부모님들을 상대하며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안고, 문 닫을 시간 루크의 카페에 들어온다. 로렐라이는 한숨을 푹푹 쉬며 이런 말을 한다.
"찾았다고 생각한 것을 또 놓쳤어."
"뭘, 찾았는데?"
루크가 무심한 듯 하지만 진정성 있게 대화를 이어가 준다.
"Love, comfort, safety."
로렐라이는 늘 찾고 찾던 무엇인 듯, 정확히 막힘없이 대답한다. 나는 여자로서,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 불안감에 쉽게 떠는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말하는 단어들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내 가족을 위해, 내 자녀를 위해, '사랑, 안위, 안전'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진 관계, 완전한 가정을 원하는 것이다. 평범하게 행복한 사람들은 다 누린다는 가족이 편안히 거할 수 있는 안전한 집에, 자녀에게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부모에,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똑똑한 아이들, 그리고 잘 훈련된 개와 고양이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인 완전한 가정 종합세트를 원한다.
로렐라이는 고통스러워하며 속마음을 고백한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가까이 왔는데, - 철없던 청소년이었던 로리의 아빠가 자녀를 잘 책임지고 가정을 잘 꾸릴 수 있는 남자로 완전히 성장해서 이제 함께 하면 정말 잘 될 것 같았는데, 이젠 정말 전통적이고 평범한 가정 꾸려 함께 잘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 온 우주가 나서서 망쳐버렸어. 크리스는 이제 정말 그런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남자가 되었는데, 나와 로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가정을 꾸리... "
로렐라이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먹인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정말 가까이까지 왔는데, 잠시 잡았는가 싶었는데 영원히 놓쳐버린 가슴이 터질듯한 아쉬움 안타까움 비참함이 그녀의 마음을 찢는다.
"크리스의 여자 친구가 임신을 했어. 크리스는 이제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 친구에게 청혼을 할 거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내내 곁에 있어 주겠지. 자신의 아내가 뭘 하든 곁에 있어 주겠지."
로렐라이는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던 결핍감을 마구 쏟아 놓는다. 자신이 거쳐 왔던 임신, 출산, 어린 자녀 양육,.. 그 모든 과정에 크리스가 없었던 기억들이, 이제 괜찮은 아빠, 남편감으로 성장한 크리스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게 된 사실이 너무나 서럽다.
"내 삶은 하나도 변한 게 없이, 전처럼 - 그렇게 딸하고 둘이서만 외롭게, 가끔 연애를 해도 완전히 편안하고 안전한 관계라고 느낄 수 없는 불완전한 관계로 고통스러워하며, 결코 결핍의 느낌을 씻을 수 없는 정서적 고통 속에서 - 똑같이 살아가겠지."
"그렇게 많이 나빠? 넌 로리가 있잖아."
결혼을 한 적도, 아이를 낳아 본 적도 없는 루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넌 친구도 있고,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튼튼한 위장 - 로렐라이가 매일 커피를 달고 사는 것에 대해 하는 말- 도 있잖아"
"맞아, 그렇게 심하게 나쁘진 않아. 난 운이 좋지, 나도 알아. 그냥 나는 앞으로도 결코 다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이 절망적인 느낌이 힘들 뿐이야."
로렐라이는 자신이 염원하는 평범하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종합세트(whole package)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며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늘 농담 따먹기나 좋아하고 발랄한 그녀가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이런 감정 고백하는 거 정말 싫다고도 말한다.
"난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있는 거. 완벽한 커플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거 고백하는 거 정말 싫어. 내가 원더우먼이라 상상하며 버텨왔지만... 난 정말 가지고 싶어. 그 완전한 가정 종합세트!"
이렇게 말하는 로렐라이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해서 보는 사람 누구나 가슴이 찢어지는 대목이다.
그 순간, 루크가 도넛이 담긴 접시 하나를 무심하게 툭 밀어주며,
"넌 오늘 도넛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어머니 없이, 누나는 집을 떠나 버리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힘들었던 지난날, 모든 것을 스스로 삭여온 루크,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달랠 줄 모르는 루크가 도넛 하나에 위로의 마음을 다 담아 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인생에 완벽한 종합세트 없어도 즐거울 일은 많다고 알려주고 싶은 것일까.
루크가 도넛에 담은 마음을 그대로 전해받은 로렐라이의 마음에 감사함이 밀려들고, 그녀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 집으로 돌아간다. 점점 마음을 잘 추스르고 딸과 즐겁게 지내는 일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다 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이 세상에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 어떤 결핍을 가진 사람들 눈에, 그 결핍 대신 다른 결핍을 가진 사람의 고통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없는데 저 사람은 가졌다는 것에만 집중하여 비교하기 때문에, 나는 없어서 괴로운데 저 사람은 다 가진 것처럼 느끼고 스스로를 불행감으로 꽁꽁 묶는 것일 뿐이다.
나도 완벽한 가정 종합세트에 목을 매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가정에 구멍이 생기고 불완전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둘째 출산 직후, 남편과 이혼을 하니 마니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남편이나 나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어떤 최선의 선택들을 하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다 같이 어떤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함께 짚어보고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이 없었다. '완벽한 가정 종합세트'에 대한 집착만이 강하게 들러붙어 모든 것을 어렵게 만들고, 나 자신을 심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데, 완벽한 가정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견딜 수 없는 비수가 되어 내 속을 끝없이 난도질할 뿐이었다.
어느 날, 그 종합세트에 대한 집착, 다 가져야 한다는 마음을 내 속에서 털어 내고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원하는 마음 자체가 고통이고 지옥임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나만 통제할 수 있다. 내가 종합세트 같은 다 가진 가정의 그림을 그려내려고 아등바등 애쓸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을, 그럴수록 관계에 드리우는 갈등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삶은 더욱 힘들어질뿐임을 확실히 느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중요한 자각의 방향으로 내 삶이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나도 다 가질 필요가 없지만, 내 자녀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다 가지지 못해도, 이미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 세상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아도 괜찮다.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다. 자녀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충분히 자각하고, 자신과 타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에 적어도 부모인 내가 방해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교육을 시킨답시고, 세상 기준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간답시고 아등바등하는 사이 아이도 부모도 끝없는 비교의식 열등감 자기 비하 자기혐오의 지옥에 빠져들기 쉽다. 다 가지겠다고 용을 쓰다 지옥 끝까지 갔다 온 사람의 경험담이다.
대문 사진 출처: https://www.nytimes.com/2020/11/23/arts/television/gilmore-girls-cw.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