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고통
가난의 기준이 뭘까
*가난의 사전적 의미: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 혹은 그 상태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빠 사업이 부도나고 단 칸 셋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을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저 집 이제 가난해졌다'라는 표현을 썼다.
단 칸 셋방에서 할머니와 다 같이 살긴 했지만, 가난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공부방이 따로 없어서 좀 불편했고, 등하교 길에 전에 지나다닌 적 없는 으슥한 골목길을 통과해 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적응해야 할 변화일 뿐, 내가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내 안에 가난에 대한 기준은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였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평생 한 끼도 굶은 적이 없었기에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이 한 번도 스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과외를 다섯 개씩 뛰고, 라면으로 많은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그때도 굶은 적은 없었기에 가난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예쁜 옷을 봐도 살 수 없다는 한계를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백화점 진열대에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여서 가난을 굳이 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내 것으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가난은 누가 정해주는 걸까.
나는 사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내가 인정할 만한 정말 가난한 사람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일단 미국에선 실업자 혹은 저소득층으로 인정이 되면, 푸드 스탬프 - 먹을 것을 사는데 쓸 수 있는 비용 혜택 -과 기본 생활비를 포함해 여러 가지 정부 보조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자녀일 경우는 학비 면제 혜택에 각종 장학금도 많이 주어지기 때문에,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공부 하고, 보다 풍족한 인생 후반전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가난에서 삶을 일으킨 자수성가 스토리, 반전 성공 스토리들을 어렵지 않게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미국의 한인 교회들은 형편이 빠듯한 유학생들을 많이 돕는다. 유학생들을 돕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인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유학생들도 사연을 들어보면, 공부에 투자하기 위해 잠시 선택적 가난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지, 대부분 한국에서 학비와 기본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시는 형편 넉넉한 부모님이 뒤에 계시는 경우가 많다.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이, 허름한 아파트 - 월세 살이 -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집을 사지 않고 돈을 모으며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 지인들, 친척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만족하는 정도의 수입이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은행에 어느 정도 쌓인 현금도 있는 그들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간다. 아파트에 월세로 거주하는 것은, 자녀의 학교 학군 때문에, 혹은 직장 때문에, 원하는 집을 충분히 찾아볼 시간을 벌기 위해 선택적으로 취하는 거주형태일 뿐이다. 월세 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남들 눈에 가난해 보이는 것이지, 그들이 정말 가난한 것은 결코 아닌 경우가 많다.
노숙자는 가난하다고 해야 할까. 길가에 텐트 치고 살아가는 노숙자는 나보다 많이 가난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가난에 그치지 않는 더 복잡한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무료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관과 센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회적 장치들이 있지만, 많은 경우 정신적 문제로 기관들이 제시하는 규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견딜 수 없어 다시 노숙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도네이션을 버릇으로 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인 만큼, 다시 일어서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도 많겠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고 한다.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가 너무나 힘든 그들의 정신적 문제가 오늘도 그들을 지독한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가난은 관념일까 실체일까
나는 정신이 일상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 중에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나는 나를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가난한 사람이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가난하지 않다고 믿고 사는 나의 소신에 코웃음 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 구조적으로 어떤 수입 수준, 재산 수준 이하의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분류된다는 통계자료 같은 것을 들고 나온다면, 내 말은 그냥 주관적인 관념을 내세우는 억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사회 구조적으로 분류하는 가난도 결국 하나의 관념, 사회적 통념일 뿐이다. 스스로 가난하다 생각하건, 남이 가난하다 지적하건, 모든 것은 사회 문화 속에서 취득한 가난에 관한 관념이 만드는 허상일 뿐이다.
누군가 내 낡은,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 - 20불에 구매한 - 를 가리키며 그게 가난의 실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난의 실체라는 것을 인정할 마음이 없다. 나에게 내 낡은 운동화는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이 세상 어느 무엇보다 내 발을 아끼고 도와온, 소중하고 요긴한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넉넉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에 가난이라는 관념도 실체도 좀처럼 내 삶 안으로 파고들 수가 없다.
가난의 고통
아무리 둘러봐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배고픈데 밥을 못 먹어 고통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 대한 관념 때문에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졌고 넉넉하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과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 다 가지는 것 못 가지면 가난한 것이라는 관념, 자기 연민, 가족 연민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가난의 고통이 아니라 비교의 고통인 것은 아닐까. 가난이라는 것을 그렇게 의식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남보다 못 가진 것을 가난이라고 여길 필요가 있을까. 내가 처한 환경이 가난이라고 보는 시선에 굴복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눈을 들어 둘러보면, 물건들이 넘쳐난다. 아무리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상상이라도 해보려 해도, 이렇게 넘쳐나는 물건들 틈에서 도무지 가난하다고 여길 수가 없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물건들을 추려 도네이션 센터에 들고 간다. 나에게 쓸모없지만, 새것 같은 물건을 누군가 잘 활용하고 요긴하게 쓰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가난하지 않고 풍요를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가난하지 않고 행복하면 좋겠다. 특히 가난이라는 관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