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서, 사랑한다

버지니아 울프 소설 Mrs. Dalloway를 읽다가 상념

by 하트온


이 글에서 '당신'은 특정 인물이 아닙니다. 관계가 힘들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점철되었던 모든 대상에 대한 집합적 의미입니다.



나는 당신을 무척이나 오래 미워했다


당신은 내게 분노라는 감정을 가르쳐 주었고, 당신의 공격에 맞서는 상상 속에서 여러 번 당신을 해치고자 하는 내 안의 악성도 보게 하였다. 당신은 나를 오래 힘들게 했고, 아프게 했다. 억울하게 했고, 엉엉 울분을 터뜨리게도 했다. 당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수치와 결핍이 뭉쳐진 내 안의 자랑스럽지 않은 덩어리를 자꾸 찔러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겐 무척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나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당신만의 이유가 있겠지. 내 의지만으로 당신과 내가 좋은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나는 급속도로 당신과의 관계를 포기했다. 내가 포기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더욱 나를 미워했다. 당신이 나를 먼저 미워했는지, 내가 당신을 먼저 미워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먼저 미워하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건 모를 일이지. 내 안에 먼저 미움의 싹을 틔우고도, 내가 그걸 모르는 척 아닌 척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나의 악성을 나도 다 아는 게 아니니까.


이제 와서 누가 먼저 미워했건 그 순서 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 얼굴을 안 보거나, 안 볼 수 없는 사이라면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가끔, 멀리서 당신의 그림자 같은 것만 봐도 내 뱃속이 꼬이는 것 같은 불편한 반응이 오는 것을 느낀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몸에 항체를 형성한 것처럼, 당신과 외모나 눈빛, 말투가 닮은 사람만 만나도 극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기피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영향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고, 관계가 소원해졌는데도, 당신은 내 안에 오래 남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던진 말들과 행동은 내 안에 끊임없는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내가 느끼는 이 요동, 이 끝도 없이 지속되는 아픔과 혼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했다. 당신이 바로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들고 글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다. 내 감정을 설명할 언어를 얻어야 했고, 내 안의 뭉쳐진 덩어리를 풀어낼 흰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깨닫고 보니, 당신은 나에게 큰 감정을 불어넣는 화력의 근원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야생마의 질주를 하게 만들었고,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습격에 울부짖는 늑대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치게 하였다. 그 혼돈과 고통의 올가미를 벗어내기 위해 나는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가!


당신은 내 병의 조기발견을 돕고, 첫 수술을 강권한 은인이다. 당신이 내 안에 남아 계속 자극하고 찔러대는 것이 힘들어, 나는 내 안의 덩어리를 스스로 수술하고 떼어내기에 이르렀다. 당신을 마침내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간절한 희망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한 번, 배를 가르고 손을 쑥 집어넣어, 내 안의 문제 덩어리를 떼 내고, 다시 봉합하고 천천히 완치를 기다리는 일은, 한 번만 해 보면 두 번째 세 번째는 나름 점점 쉬워지는 일이다. 당신이 바로 그 최초의 수술과 치유까지 모두 이끈 의사 선생이었다. 힘과 근육을 키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나를 재활 강화시킨 훈련 조교였다.



그러니 당신을 사랑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당신을 미워하는 존재로 여기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은 아픔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당신만큼 나에게 유익하고 좋은 영향이 된 사람이 있을까. 내 인생에 당신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만큼 성장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이만큼 강해질 수 있었을까.


당신은 내게 강해져야 할 이유를 주었다. 내가 강하지 않아서 당신을 미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여린 속을 건드리니 당신이 싫었던 것이었다. 내가 강했더라면, 내가 강하게 맞서 당신에게 두려움을 품고 더 조심하게 만들 수 있었더라면, 내가 당신을 미워할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당신 때문에 나는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되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쓰러져도, 항상 더 강하게 일어나는 사람이 되었다.


내 결핍, 내 부족함을 드러내 주어서 고맙다. 당신이 드러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수치의 늪에 가두고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자꾸 드러내고 못마땅한 시선으로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고, 마침내 내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었다. 내가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결핍감에 고통스러웠던 만큼, 내 안의 모든 모자란 것들이 제대로 살아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여정을 거쳐, 이제는 내가 타고난 결핍이 에너지고 재능임을 깨닫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모자란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니며, 넘치는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님을 확실히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은 나의 채찍으로서 본분을 다했다. 약한 사람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당신을 몹쓸 인격 장애자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아직도 남아 있다. 내 사고 감정의 버릇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을 신에게 양도하겠다. 당신의 인격과 잘잘못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신에게 맡기겠다는 뜻이다. 솔직히 당신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귀찮아졌다. 내게 더 이상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내게 가한 채찍의 효과만을 기리며 기념비를 세울까 한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그 기념비 아래 둔 꽃다발 정도로 머물 터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사랑으로 완성해 가는 데 집중하겠다. 당신을 내 삶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의 일부분으로 기억하겠다. 당신이 떠오를 때, 고마운 사람이었다며 이젠 밝게 웃을까 한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愚木混株CDD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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