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습작
한 번 싫다고 생각하자, 음대 박사 과정은 쳐다보면 목만 아픈 뜬 구름처럼 더욱 생각되었다. 진아의 아버지는 진아의 속뜻도 모르고, 미국 명문 음대 학위를 거머쥔 김에 다음 단계로 박차고 달리는 수순은 당연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진아의 음대 입학을 도왔던 제자를 통해 음대 박사과정 지원을 진행시켰다. 몇 년 안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때, 옛 스승의 그림자 덕을 바라는 충성스러운 제자는, 다 알아서 진행시킬 테니 걱정 푹 놓으시라며 끝까지 갸륵한 충심으로 일관했다. 서로 주고받을 것이 확실한 인간의 관계만큼 아름답고 깨끗한 것이 있을까.
주고받는 것이 확실한 관계의 힘을 진아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먹잇감을 기다리는 사마귀처럼 가만히 숨죽이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진아는 주변에 사람이 필요해지면, 주로 남의 일을 해결하기 좋아하는 오지랖 타입을 선택하는 편이었다. 다만, 경험으로 알건대, 남의 일에 나서서 해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입이 가벼운 단점을 동반한다는 것이 흠이었다. 다행히, 진아는 상대의 입을 막을 약점도 꼼꼼히 준비해 놓는 섬세하고 치밀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진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대학 과정 내내 미팅이나 소개팅할 마음 있냐고, 가끔 물어보던 클라리넷 전공 정유라.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의 오빠가 예일인가 하버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진아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명문 법대 출신인 것만으론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강남에 고급 아파트나 여러 채 굴리면서 자식들 유학이나 겨우 시키는 수준의 집안인 걸 진아는 금방 알아보았다. 게다가 유라는 최근 사귀던 교포 남학생에게 실연을 심하게 당하곤, 심한 우울감에 빠져, 졸업 연주 준비고 뭐고 넋 놓고 있다가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괜찮아?"
진아는 딱 이 한 마디를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이 지구 상에 아무도 자신이 괜찮은지 물어 봐 주는 이가 없어 서러움이 뼈에 사무친 사람처럼 유라는 진아에게 안겨 엉엉 오열했다. 그러고 나서 유라는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요즘은 미팅 소개팅 주선 안 하니?"
"전엔 오빠하고 오빠 친구들이 하도 음대 여학생 소개해달라고 난리를 쳐서 그랬는데, 이젠 그 오빠들 다들 여자 친구 생겼고, 졸업 준비, 취업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난, 학부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해서 미국에서 자리 잡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다 물 건너갔어, 힝..."
"한국에 돌아갈 마음이 없단 뜻이야?"
진아가 의아해하자, 유라가 어깨가 축 처질 정도로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난 한국에서 안 살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내가 울 부모님 이혼했단 말 했었나? 울 엄마, 공부 잘하는 울 오빠 유학시켜주려는 마음만 있었지, 나까지 시켜줄 마음 절대 없었어. 난 언제나 모자란 딸에다, 엄마 감정 풀이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거든. 내가 무슨 마음으로 클라리넷을 죽도록 연습했는지 알아? 엄마의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거야. 날 구한 건 이 클라리넷이고, 난 어떤 일이 있어도 클라리넷만큼은 놓지 않고 평생 할 거야."
진아는 지금까지 수집한 유라의 약점들이 이제 충분하다 싶어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공감이 되고 짠하기까지 했다. 자신도 청소년기에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던 감정적 고통을 느꼈었고, 그래서 미친 듯이 반항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다. 차이는, 자신의 내면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신세계가 장악해 버린 반면, 유라는 자신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듯 했다. 유라의 어머니가 유라의 마음을 장악하고 들어올만한 차분한 내면을 전수해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차라리 유라처럼 거친 학대를 당했더라면, 모두 거부하고 내 마음을 지키고 살 수 있었을까. 아니, 진아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반항적 행동을 일삼던 때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준비 따위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책임하고 무모했던 기억만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해지는데, 유라가 마침 진아의 낯부끄러운 상념을 끊어주었다.
"피터가 내 결혼 상대로 딱이었는데...... "
피터는 유라가 사귀던 캘리포니아 출신의 한국계 교포로, 탄탄하게 그을린 매력이 넘치는 바이올린 전공 음대생이었다. 두 사람이 듀엣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아는, 저렇게 음악으로 교감할 수 있는 연애도 참 낭만적이다 속으로 생각했었다. 진아의 상념을 깨고, 울먹이는 듯한 유라의 회한 가득한 목소리가 진아의 고막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피터 따라 캘리포니아 갔었는데, 부모님도 진짜 너무 좋으셨거든... 난, 자기 집까지 데려가서 부모님께 인사시켜준 게 결혼 상대로 여긴다는 신호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솔직하게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싶다는 얘길 했던 거야... 그때 반응이 좀 이상하다 느끼긴 했어... 그래도,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얘도 날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은 굳게 갖고 있었거든. 알고 보니 내 착각이었지만 말이야...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 좀 하자길래, 들어봤더니... 혹시, 시민권 따려고 자신을 이용해온 거냐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더라......"
"네 진심은 제대로 전했어?"
"내가 진짜 너 좋아한다고 충분히 말했지... 그랬더니, 자신은 아직 23살인 스스로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이 든다는 거야. 결혼은 30쯤 되어서 생각하고 싶다고, 지금은 더 공부하고 경험 쌓는데 집중하고 싶다고... 그때 내가 밀당을 더 잘했어야 했는데... 상대가 뒷걸음질 치는 것 같으니 더 조바심이 나서 결혼이 부담스러우면 약혼이라도 해놓고 사귀자고 바락바락 억지를 부린 거야... 미쳤지 내가, 결국 이렇게 깨질 걸 알았으면, 좋은 추억만 남게 좋은 모습만 보여줬을 걸......"
"유라야. 우리 미팅할까?"
"넌 남자에 관심 없는 애잖아."
"내가?"
"우리 4년 음대 다니면서 본 사람 중에 연애 한 번도 안 만난 애는 너 밖에 없어."
"우리 집안 때문에. 나도 아무나 만나서 연애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울 아버지가......."
진아는, 음대 교수들을 상대로 발휘했던 영업기술을 유라에게도 유창하게 발휘하며, 자신이 어떤 집안의 딸인지에 대해 유라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명쾌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 난 유라의 표정이 부정하고 타락한 독재정권의 만행이라도 목격한 듯 비통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넌 아무나 만나면 정말 안 되겠다. 후... 그래서 음대 4년 내내 연애는커녕 미팅도 한 번 못했구나. 난 그런 대단한 집 딸 절대 못할 것 같아. 좋아하는 사람과 맘껏 연애도 못해보고, 너 너무 불쌍하다......"
진아에게 굳이 대학 입학 전에 연애할 만큼 다 하고, 놀만큼 놀아봤다고 말할 필요 따윈 없었다. 깨끗한 평판은 유라와의 필요충분조건 관계에서도 굳게 안고 가야 할 숙제였다.
"그러니까... 집안도 되고, 능력도 되는 좋은 사람을 내가 못 찾으면 울 아버지가 맺어주는 대로 해야지 뭐......"
"야, 내가 도와줄게. 난 네가 그렇게 억지로 결혼하는 거 못 볼 것 같아. 내 발이 좀 넓냐. 내가 내 주변 인맥 다 동원해서, 재력 능력 학벌 다 갖추고, 네 마음도 설레게 해 줄 사람 꼭 찾아 줄게. 나만 믿어!
진아는 유라의 말을 들으며, 사람을 저가 원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나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무척 감복했다. 딱 필요한 사람을 잘 골라낸 자신의 판단력. 사람의 성향에 맞게 마음을 열고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대인 관계 기술. 상대를 설득시켜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마련해 내는 영업 능력까지. 그럼 그렇지. 우리 아버지의 지능과 재능이 어디 가지 않고 내 안에 다 있었던 거야. 진아는 자신이 진짜 대단하게 능력 있는 집안, 내로라할 명문가의 핏줄임을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절감했다. 더 이상은 아버지의 간섭 없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