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습작
진아의 입장에서, 음대 졸업과 학위는 나름 큰 희생을 치른 대가였다. 여기에 들어간 돈과 시간이 다 얼마인가! 무엇보다, 음악 말곤 길이 없는 사람들의 노력과, 다른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신이 두 눈 감고 음악에만 쏟아부은 노력은 그 값어치 자체가 다를 것이었다.
가끔 자신의 실력으로만 여기까지 왔다 싶은 사람들을 볼 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싸한 감정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자신 또한 굳이 아버지가 돕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미모와 영리한 재치만으로도 보통 이상의 삶을 누렸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설득해 냈다.
게다가 미국 생활 4년이 지나자, 제 입에서 발음 좋은 영어가 유창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얻어 낸, 기대하지 않았던 쾌거에 감탄하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아버지가 뒷배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지만, 자신의 노력과 실력과 재능이 없었더라면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란 확신이 제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진아는 스스로의 판단 기준과 스스로의 능력을 조금씩 믿으며, 다음 단계를 위한 아버지의 조언을 감히 저울질해 보았다.
"음대 학사 학위 만으론 음악 선생 자리 말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구나. 내친김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박사까지 해라. 박사학위를 따서 돌아오면, 네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자리 하나 마련해 놓으마."
진아도 박사 학위를 원했고, 교수 자리도 원했다. 상류층은 서열로 움직이는 냉정한 세계다. 마치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달달이 순위를 매겨 벽에 붙여놓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는 전교 석차 같다. 나도 100위 안에는 들어야, 100위 안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다. 할아버지가 세워놓은 집안 이름과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의지하고, 자신의 미모로 바탕을 깔고, 평판과 학벌 두 마리 토끼만 잡아 내면, 10위 권도 넘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아버지와 남편이 가진 힘과 재력 둘 다를 포근한 베개 삼고 이불 삼아 넉넉하고 안락하게 살다가 자식들에게 같은 인생 시나리오를 반복시키면 대대손손 명문가가 이어지고 내 핏줄을 이어받은 존재들은 언제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이것이 진아가 지향해야 할 인생 최대의 사명이고 목표일 것이었다.
문젠, 그놈의 박사 학위에 5년 이상의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진아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를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의 싱싱하고 새것 같은 아름다움이 그리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광고 모델 출신 어머니를 보며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아직도 어디서나 눈에 띄게 아름답다. 하지만 진아는 20대만이 가질 수 있는 풋풋한 아름다움의 힘을 실컷 자랑하고 누리고 싶었다. 이 곰팡내 가득한 퀘퀘 묵은 - 그들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 학교 건물 속에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몇몇 꽃미남과인 남학생들의 호기심과 열망이 가득한 눈길을 슬쩍슬쩍 받고 즐기면서도, 그녀는 이 남자들이 결코 그녀의 상대가 될 재목이 아니라고 재단한 이상, 틈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텼다. 자신에 대한 깨끗한 평판을 기어코 만들어 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던 터, 한 눈 팔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동하는 연애 본능을 누르고 또 눌렀다. 자신의 빼어난 몸의 곡선을 슬쩍슬쩍 보여주며, 사슴 같은 크고 영롱한 눈망울을 아련하게 깜박이며, 자신의 매력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안달 난 마음을 가지고 노는 맛을 잘 알고 있는 진아는, 그 맛이 심히 그리웠으며,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가는 길, 더없이 청초하고 생기 있게 활짝 핀 자신의 외모와 매력이 아까워서 한 번씩 마음 한편이 심히 아릴 지경이었다. 박사 과정 5년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