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쓰고 싶은 책
글의 온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10여 년 넘게 한국식 찜질방이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찜질방이 내부 시설도 깨끗하고 파는 음식도 정갈해서 나는 자주는 아니라도 나름 정기적으로 찾아갔었다.
내가 찜질방에 가는 시간은 좀 특이했던 편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거나, 폭염 주의보나 한파 주의보가 있는 날, 눈이 내리고 길이 얼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을 주로 선택했다. 사람들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시간을 고르는 노력이었다. 그런 날 이른 아침 시간엔 목욕탕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치 널찍한 대리석 욕조를 갖춘 럭셔리 왕족 욕실을 다 차지한 기분.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욕탕의 온도를 내가 나에게 딱 맞게 적당히 맞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욕탕의 온도는, 근육이 아... 하고 시원하게 풀리는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온도랄까. 구름 위로 뛰어올라 둥둥 떠다닐 수 있도록 영혼을 적당한 높이로 끌어올려주는 온도랄까.
찜질방의 욕탕 온도가 그토록 중요한 만큼, 책에 있어서 내게 중요한 한 가지 기준은 '글의 온도'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이름난 천재 작가라도 체온을 떨어뜨리는 글을 나는 좋아하지 않으며, 내 생살을 벌겋게 지져대는 너무 뜨겁고 아픈 감촉으로 다가오는 책도 나는 오래 읽을 수 없다. 가능한 오래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적당한 온도의 책을 찾기 위해 나는 종종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 보는 것이다.
이야기꾼의 신명
내가 드나들던 그 찜질방엔 망에 넣은 마른 꽃과 약초 섞은 것을 띄워 욕탕 물에서 은은한 향이 나게 했다. 물의 온도와 함께 코가 느끼는 즐거움도 그 시간을 즐겁게 만드는 큰 요소였다. 글의 온도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한참 앉아 있다 익숙해지면 조금씩 지루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나는 약간의 향이 필요하다. 글에 있어서, 내 마음을 계속 깨어 집중하게 돕는 기가 막힌 향은, 글 쓰는 작가가 글을 쓸 때 가졌던 흥분과 설렘이다. 신나는 이야깃거리를 가진 화자가, 상대방이 보이는 격한 반응을 즐기며 이야기의 속도를 애간장이 타도록 밀당 조율해가며 웃겼다 울렸다 상대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드라마틱한 연출. 바로 타고난 이야기꾼의 신명이다.
마음의 묵은 때를 시원하게 벗겨주는 언어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그 책을 정말 잘 썼다고 느낄 수 있기 위해선, 내가 가져갈 언어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찜질방 목욕이 아무리 좋았어도, 때를 밀지 않고 나오면 찝찝하다. 경험 많고 기술 좋은 세신사를 만나서, 구석구석 찝찝했던 때 껍질을 깨끗이 밀어 내고 나와야 심신이 제대로 상쾌해진다. 세신사가 해주는 마무리 마사지가 내 근육이 딱딱하게 맺힌 곳들을 풀어 주어야, 나는 온몸이 개운해지며 스트레스까지 확 풀고 나오는 기분이 들고, 나를 사랑하고 돌보는데 돈을 참 잘 썼다는 기분이 든다.
책에 있어서 그런 요소는 바로, 내 마음이 뭉쳐있는 곳을 딱딱 짚어 풀어주는 언어다. 이야기 곳곳에 배어있는 작가의 단단한 내면 내공이 내 마음의 묵은 때를 박박 벗겨주는 마이더스 세신사의 손길이다.
내 글은 어떤 온도와 향으로 다가갈까
타인이 쓴 글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찾는 나는,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글을 쓰는 나의 마음, 나의 내면, 나의 성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 좋은 세신사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만능 때수건을 손에 쥐고, 울퉁불퉁 다져온 믿음직한 근력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적당한 온도와 은은한 향을 즐기며 글 속에서 때를 잘 불리셨나요? 자, 이제 본격 때 미는 시간입니다. 여기 누우세요, 구석구석 마음의 묵은 때를 시원하게 벗겨드립니다!
그리고 책 목욕을 마치고 나가는 독자들이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이 정말 시원해졌어요. 정기적으로 이런 시간 가지고 싶어서 찜질방 1년 회원권을 끊었습니다!
대문사진 출처: Pixabay (by nguyenhon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