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일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쓰는 나의 이야기

by 하트온

제 인생엔 아직 누구도 가까이 와 본 적 없는, 저 스스로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위험하고 뜨거운 산 하나가 버티고 있어요.


그 중심부에는 저의 과거 상처의 기억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어요. 그게 오래 고여 방치되니 ‘심리 문제’라는 마그마를 형성하더군요. 현재 삶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자극이나 스트레스도 '트리거'가 되어 화산 폭발이 자꾸 일어나요. 화산 폭발은 제가 원하지 않는 수많은 감정들을 터져나오게 합니다.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용암은 수치심으로 벌겋습니다. 아직 채 식지 못한 마그마의 열기에 솟구치는 간헐천은 분노와 원망으로 부글 거려요. 아직 벌겋게 뜨겁게 살아있는 상처의 기억과 감정들은, 문득문득 떠올라 저를 그 열기에 데어 움찔거리게 합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 곳, 시간이 가면 저절로 식어지겠지, 괜찮아질 거야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마그마는 더 응축되고 그 열기가 더 강해져, 분화 위험만 더 커졌습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조절하고 살살 다루는 방법을 찾았지만, 그건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어요. 이 산이 버티고 존재하는 한, 이곳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주변 사람들과 진실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큰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이루는 나의 과거 경험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각종 부정적인 감정과 뒤엉켜 고름 분비물처럼 장악하고 있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다 꺼내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덮어 버린 것에서 시작해서 그게 눈덩이처럼 커져버려서, 진실된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 지경에 와 버렸어요.


저는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다가가기 쉬운 사람 같지만, 가까이 와보면 몇 겹의 철벽이 있어요. 결코 사람을 쉽게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요. 겉으로는 웃지만, 속에서는 언제든 핑계를 대고 도망가거나 차단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특히 수치심을 자극하는 사람, 내 개인 프라이버시와 감정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는 사람, 나를 함부로 판단하고 잘 아는 척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제 마음이 감당하지 못해 쉬이 뱉어 버려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해도, 정말 마음을 다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마음을 열 만큼 안전하다고 느끼기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거대하고 위험한 산에 눌려 늘 불안해하며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더 이상 이 화산을 제 마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제가 똑같은 일, 똑같은 실수 반복하는 걸 워낙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 화산을 건드리지 못해 계속 반복되는 심리적 패턴에 휘둘려 살아오면서 정말 지겨웠거든요. 이 패턴을 이제 벗어내려고요.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게 된 김에, 큰 맘먹고, 산을 확 파서 열고, 대청소, 대정리를 한 번 해 보려고요. 남은 인생의 시간을 다 바쳐야 하는 일이라 해도, 이 일에 한 번 '존버' 해보려고요. 처박아 놓고 방치했던 기억들, 상처들 하나하나 다 꺼내 정리를 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도 갔다가 미래도 갔다가 제 삶의 구석구석을 빛으로 비춰보고 다시 정리하고 싶어요.


이 일은 다시 쓰는 제 인생 이야기가 될 것이고, 동시에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될 거예요. 과거의 상황을 다시 해석하고, 용서하고 감사를 찾는 시간이 될 것이고, 저의 자아상을 회복하는 시간, 제 자신에 대한, 제 경험에 대한 느낌을 긍정적으로 회복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


사실 너무 두렵고 떨리고 그래요. 제 속의 이 오래 묵은 수치심들과 분노들을 다 꺼내놓고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이게 깨끗이 정리가 될까. 제 속에 의심이 자꾸 파고듭니다.


하지만 저는 지지 않으려고요. 이 일을 꼭 시작하고 싶고, 해 낼 거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싶어요.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다는, 아니 산을 뜨겁고 위험한 곳에서 쾌적하고 안전한 곳, 누구든 초대해서 맘 편히 쉬다 가게 할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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