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트온 Dec 10. 2021

정신적 결핍과 혼란을 융합으로 극복한 존 스튜어트 밀

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6

존 스튜어트 밀의 영재 교육


19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어권 철학자, 현대 자유주의의 시조, 리버럴 페미니즘의 시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계몽주의,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철학자였으며 제레미 벤담과는 늘 생각을 교류하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에게 태어난 6명의 자녀 중 존은 아버지의 장남으로서 엄청난 기대와 책임 속에 자랐다. 당시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철학적 지식의 기반이 매우 중요했던 만큼, 아버지 제임스는 존이 아주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 과정을 철저히 이수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섰다. 존이 17세에 국가 고위 공무원으로 취업할 때까지 아버지가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매일 수업 일정을 짜주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사유 과정까지도 모두 관여했다.


그가 받은 교육 스케줄을 한 번 살펴보자면,


3세에 그리스어 배움

5세에 그리스 고전들을 읽음

6세에 기하학과 대수학 배움

7세에 플라톤을 원서로 읽음

8세에 라틴어 배움

10세에 아이작 뉴턴의 수학 이론 배움, 로마 정부의 기본 이념에 관한 책 집필, 이때부터 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

11세에 물리학 화학 논문들을 읽기 시작

12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공부

13세에 애덤 스미스 철학 공부

15세에 1년간 프랑스 여행

16세에 계몽주의 철학, 심리학, 정부/정치학 공부


이때까지 매일 아버지가 존의 학습을 관리했고, 존은 동생들의 학습을 관리해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도한 학습 과정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이, 제레미 벤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존 로크, 아담 스미스,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수학자/과학자들이었으리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


17세에 존은 동인도 회사의 공무원이 되는데, 회사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인도에 보내는 통신문을 맡아서 작성하는 수석조사관 직무였다고 한다. 그 자리는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만 뽑는 고연봉 고전문직이었다고 한다. 존은 이 업무를 통해 자신의 철학 사상을 동인도 회사의 인도 통치 정책에 반영하도록 만드는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정신적 위기(Mental Crisis)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공부를 한 것이 어느 순간 급체를 하는 순간이 왔다. 20세 이후 존은 괴로워했다고 한다. 공리주의 철학을 이어갈 열정을 상실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기억할 수도 없는 순간부터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온 이성에 치우친 생각들이 만들어낸 불균형과 혼란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논리와 지식은 머리를 꽉꽉 채우고도 남는데, 자신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결핍감.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들은 너무나 부족한 상태라는 낭패감,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강타했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들끓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 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정한 삶을 일구고 살아가는 방법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삶의 심한 부조리에 화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다행히 영국은 예술문학의 낭만주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고, 존은 낭만주의 문학을 접하면서, 불안정하게 치우친 자신의 내면을 다시 세워갈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그는 특히 워즈워스, 콜리지의 시를 많이 읽었고, 칼라일과 괴테의 글을 즐겨 읽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문학을 통해, 존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혼란들을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수용하고, 자신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던 지식들을 다시 살펴보고 비판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의 내면의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내면에 세워진 편향적이고 엄격한 공리주의 -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의 허점들을 꿰뚫어 보기 시작하였다. 이성 제일주의 바탕 위에 세워진 공리주의와, 그러한 공리주의 위에 세운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성적 분석, 사색 사유뿐 아니라 감정과 감수성 또한 간과되지 말아야 할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배운 공리주의 철학들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꼬집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따르는 철학 사상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믿는 다른 철학 사상, 학문 사조들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과 접목시키고 융합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아버지와 벤담의 공리주의를 마침내 뛰어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보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공리주의 체계를 세워나갔다. 그는 공리주의라는 뼈대 안에,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권리를 중요시하는 마음을 수용해 채워 나갔다. 이러한 존의 융합적 철학 사상은 이후 사회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철학의 토대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존이 성장하고 세상에 눈을  가면서, 정직한 마음, 바른 양심은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격렬하게 통증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같다. 그는 특히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  불평등에 분개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간 차별, 불평등이야 말로 맞서 싸워 바꾸어 내야  문제라고 여겼다.


그는 또한 당시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남녀 불평등의 문제도 직시했다. <여성의 종속>이라는 저작을 통해 여성 평등과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여성의 무능함이 잘못된 여성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남녀평등에 대한 그의 노력은 책의 저술에만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졌다. 존은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의 학장이면서, 동시에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866년 헌정사상 최초로 하원의원으로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존은 man이라는 단어가 휴먼, 인류라는 의미로 쓰이는 한 남성이라는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당시엔 보수파들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지만, 후세에 이르러 리버럴 페미니즘의 시조라는 칭호를 그에게 선물에 주었다.


존이 여성이 남성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동등한 존재임을 확실히 체감하는데, 아내 해리엇 테일러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혼란과 방황의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던 존이 해리엇을 만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크게 얻었다고 전해진다. 존은 해리엇을 매우 사랑했고 그녀의 생각을 매우 존중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존의 나이 24세(1830년)에 23세의 해리엇을 만나지만, 그때 그녀는 이미 두 아이를 둔 유부녀였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존의 친구이기도 했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관계임에도, 존과 해리엇은 20 년이 넘도록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존이 45세(1851년)가 되던 해에 두 사람은 결혼하였고, 7년 정도의 결혼 생활을 했다. 1858년 두 부부가 프랑스 여행을 하던 중 해리엇이 사망하여 아비뇽에 그녀를 묻었다고 한다. 이후 존은 프랑스 아비뇽, 그녀의 무덤 근처에 집을 마련하여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다, 자신도 아내 곁에 묻혔다.  


그는 해리엇을 만난 이후에 많은 저서를 집필하고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의 모든 저작들이 아내와 함께 쓴 것이라고 그의 자서전에서 철학 사유의 동반자 동료로서 아내의 큰 영향을 인정한 바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논리학 체계> (1843)

<정치경제학 원리> (1848)

<자유론> (1859)

<대의 정부론> (1861)

<공리주의> (1863)

<여성의 종속> (1869)

<자서전> (1873)

<사회주의론> (1879, 존의 사후에 발표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언론과 사상의 자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윤리적 다원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자유주의 사상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의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에게 편향적인 이성적 사상만을 심어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은 혼란스러웠고 아팠지만, 자신의 온 시간과 노력을 다 바쳐 자식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던 아버지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은 부족할 수 있다고 자신이 가진 것을 수용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타인의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접목시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피할 수 없이 강요된 독선, 그것이 부르는 불균형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더 나은 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세워가는 과정을,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결핍의 건조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일구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생각이 편향되어 있고, 부족하고 불안정한 결핍이 가득하다. 그것을 가리고 포장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내 안에 무엇이 부족한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 중요한 것들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균형 잡히고 건강한 내면, 온전한 삶을 세워나가는 것이 최종 목표다.


19세기에 최선을 다해 그 작업을 했던 존 스튜어트 밀이 마침내 물꼬를 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물줄기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들을 수용하고 융합 정리하여 남은 21세기, 그리고 22세기로 흐르는 생각들이, 인간에게 (개인 각자에게) 더 유익할 수 있도록, 각종 부조리와 폐단을 극복하고, 다 함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도록 물꼬를 틀어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은 숙제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rdaconnect)


작가의 이전글 <미니멀리스트의 유용한 도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