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하기 전에
자존감(Low Self-Esteem)
'자존감'이란, 유행 신조어처럼 번져 이젠 모든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게 된 심리학 용어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낳는 용어들에 대한 내 감정은 동전의 양면을 가진다.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에 대해 환영하는 앞면과, 자칫, 함부로 마음을 진단할 보편적 기준 잣대가 되어 버리는 위험성에 반발하는 뒷면.
사실, 나는 뒷면의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중이다. 자꾸 스스로의 자존감을 진단하라고 하는 문화의 압박이 지겨워져, '자존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글은 읽지도 않고 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존감'이 꽤나 진부한 단어가 되어버린 만큼, 이 글을 제목만 보고 패스해 버릴 '자존감'이 지겨운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간 것이 이제 10여 년 가까이 된 것 같다. 학술적으로는 20년 이상 사용되어온 단어지만, 이 단어 활용이 대중적으로 정착된 것은 2010년 이후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자신과 서로의 마음 상태를 평가하는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존중감.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통용되며, 이 글에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하겠다.
내가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주변 친구, 지인들이 이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친구들이 사용한 문장들의 예를 아래에 들어보았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보니까,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 다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더라고.
다른 형제들은 다 공부 잘해서 명문대 진학하고 나만 대학을 못 갔거든. 그래서 내가 자존감이 무척 낮고, 늘 괴롭고 힘들어.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건강에도 좋지만 자존감 회복에도 좋대.
서로 자존감 수준이 비슷해야 잘 맞대. 그래서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비슷하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끌린대
자존감이 낮다는 걸 깨달은 그다음엔?
스스로를 낮은 자존감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결정하고 나면 뭐가 좋은 게 있을까.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게 행동하는구나, 그런 감정을 가지는 구나 정해버리는 것이 좋은 점이 있을까?
'낮은 자존감'의 고통을 정말 겪고 있는 중이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 도움을 받게 된다면 좋을 수 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 체 하기보다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바탕으로 진단하고 그 말들을 자꾸 귀담아듣는 모습에서, 마치 어릴 때 어른들이 보던 신문 잡지에 매일 등장하던 '오늘의 운세', '혈액형별 성격', '별자리 운세'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들을 읽고, 자신의 태도를 정하고 그것을 잣대로 타인에게 휘두르던, 위험할 정도로 순박한 마음들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못 미더운 느낌이 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천차만별의 모습과 경험으로,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두 '낮은 자존감'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그것은 사실에서 몹시 어긋난 선무당 사람 잡는 일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두통을 겪는 것 같아도, 사람마다 두통의 근원이 다 다른 것처럼,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게 부정적으로 보여도, 그 근원은 다 다양하지 않을까.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한다거나, 더 뿌듯해 할 수 있을 만한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통제에 의존하는 것 같은, 근본 문제 해결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지붕에 물이 새서 비 오는 날 천장에 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고 있는데, 지붕을 들여다 보고 근본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흡수력 좋은 수건만 검색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감정이 부정적인 것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낮은 자존감 회복 방법을 찾아 헤맬 일이 아니라, 이 감정이 어디서부터 새어 흘러나오는 것인지 그 근원을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그 근원을 찾아 지붕을 고치는 것처럼, 정확히 아픈 마음 그 자리를 돌보고 치유하면, 감정의 온도는 삽시간에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더 노력하기 전에 내 기준부터 점검해야 한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게 되는 이유는 많을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다.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도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 내가 가진 기준에 나 스스로가 못 미쳐서 감정이 좋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의 기준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기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내 안에 고착되었는지를 샅샅이 파헤쳐야 한다. 자꾸 내가 부족하고 못났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기준을 내 마음에 들이대는 사람은 없는지, 그런 기관은 없는지 내 주변도 잘 살펴야 한다.
면역이 너무 약한 사람은 일단 무균실로 옮겨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외부 기준에 대한 마음의 저항력이 약해져 있는 사람은 무'기준'실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어떤 기준을 세워 찌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나 자신을 피신시켜야 한다. 그런 후에, 내 온몸에 박힌 유리파편 같은 외부 기준들을 하나하나 빼내고 피를 닦고 약을 발라주어야 한다. 그렇게 나은 후에는, 어떤 것이 내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쓸데없는 기준인지를, 그 기준들에 어떤 독이 묻어있는지, 어떤 독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알아보고 피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다신 아프고 싶지 않기에, 우리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해져 그 파편들을 튕겨낼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그 독소 가득한 유리 파편이 박혀있지 않은 우리 몸에 흐르는 감정은 점점 깨끗해지고 맑아진다.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워진다. 더 이상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깨끗이 병이 나은 사람의 혈액 농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염려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해 버리지 말자. 그런 말이 나의 결핍을 꼬집어 내고 나를 욕하는 또 하나의 용어처럼 느껴진다면 과감히 벗어 버리자. 그것에 갇혀 무기력해지지 말자. 그런 단어로 나를 규정하고 분류하려 했던 마음, 나를 향한 의구심을 깨끗이 씻어 버리자.
나를 믿자. 나는 언젠가는 유리 파편들을 다 뽑아내고 강철처럼 강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자. 그런 후에 나를 향한 나의 감정은 절로 깨끗이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자. 회복의 희망을 마음에 소중히 품고 강하게 나아가자.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johnh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