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여행 중입니다
내내 용서를 구했다
나는 '미안해', '미안해요'라는 말을 달고 사는 아이였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 게 많던지 나는 말끝마다 사과를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중심을 뒤흔드는 정서 불안이 나의 내면에 기준을 잡지 못하게 방해했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간헐적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아버지의 폭음과 분노의 정확한 근원을 알지 못하는 어린 마음은 자신의 행동과 말이 그 원인인지도 모른다고, 혹은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느낄지 모른다고, 모든 갈등의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서부터 상대의 심기가 조금만 불편해지는 듯 보이면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을 종잡을 수 없는 내가 타인 - 나보다는 훨씬 보편적 세상 이치를 잘 파악하고 있을 - 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었을 것이다.
나의 '미안해요'는 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을 모르겠어요. 혹시 내 말이나 행동 때문에 불편하다면 양해해 줘요. 내가 잘 모르는 것을 한 번만 봐주면, 내가 다음부턴 더 잘 배우고 더 잘 행동하고 당신이 편하게 함께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도록 끝없이 노력할 게요'라는 호소와 부탁이었다. 이런 모습이지만 함께해 달라고 같이 있어달라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불쾌해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매달림이었다.
나는 공격성이 전혀 없는 몹시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빚어져 갔다.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 없는 마음이 나 자신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나를 지키는 말과 행동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무방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무방비한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것은 무수히 쏟아지는 공격과 침범뿐이었고, 가슴에 남는 것은 상처와 억울함뿐이었다.
용서 못하는 마음
겉은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흐느적거리는데, 피고름이 끝없이 터지는 마음자리에는 점점 엉킨 핏덩이가 돌덩이처럼 까맣게 굳어 갔다. 내 안에 분노와 미움이 단단히 자리 잡았던 것이었다. 어렸던 나는 내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체,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은 그 까만 덩이가 자아내는 시큰하게 피비린내 나는 감정만을 물씬 느끼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나는 무언가 부수고 싶은 파괴적 욕구가 내 마음속에 들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사춘기 변화로 증폭된 정서 불안이었다. 불안이 커져 파괴 욕구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자신이 없던 아이는,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이 이상한 욕구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매일 밖에 나가서 정처 없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모든 파괴적 힘을 다리로 풀어내겠다는 듯, 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렇게 다리로 헤매고 다녔던 만큼, 나는 내가 살았던 지역,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쯤 되는 동네 구석구석을 지금도 환히 기억한다.
내가 환히 기억한들, 그곳은 지금 재개발로 다 사라지고 없다. 그 지역에 출장을 갈 일이 있어 다시 찾아간 초등 동창이, 몇 년 전 내게 특이한 건물로 유명했던 '우리 집'을 찍은 사진과, 친구가 머무른 고층 건물의 호텔방에서 찍은 동네 전체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그곳은 내 기억 속의 장소와 전혀 다르게, 숨 쉴 틈 없이 고층 빌딩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내게 고향 - 어린 시절 살던 그대로의 마을 같은 것- 이 남아 있었더라면, 나는 내가 살던 곳에 다시 가 보기 위해서라도 몇 번은 더 한국 방문을 시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겐 고향이란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재개발이 일어나 버리는 곳은 거듭거듭 새로운 동네, 타인의 한시적 거주지로 재탄생하고, 누군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뒤집어 파헤쳐지고 사라져 버린다.
내가 살았던 흔적이 없었다. 내가 쉽게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삶의 흔적들이 그렇게 묻히고 사라져 버렸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젠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 나를 화나게 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끝없는 복수
내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원망과 분노가 살아 있었다. 나의 분노의 표현, 나의 파괴적 표현은 바로 '떠나는' 것이었다. 영영 사라져 사람들 마음에 이해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빈 구멍을 남기는 것. 자신들이 함부로 대했던 어린 소녀, 어린 여자에 대해 후회와 미안함과 의문을 영영 품어야 하는 것.
당신의 인생에 누군가 사라진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보호할 줄 몰랐던 한 약자가, 자신에게 해를 입힌 당신의 마음 한 자락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을 더 파괴하고 뿌리를 끊어내 버린 것이다. 당신은 복수를 당한 것이다. 마치 사회 전체로부터 희생을 강요당한 어머니라는 존재들이, 반항 대신 선택한 복수, 어머니의 희생에 끝없이 의존하고 동시에 죄책감을 내내 품고 살아가게 만드는 '소심한 감정의 복수'처럼 말이다.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이 자학으로 일으키는 '묘하게 끝없이 불편한 감정적 복수' 말이다.
길들여 버리는 복수를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즈음에야 어머니라는 존재가 인생에서 사라지고 당신은 어머니 없이 망연자실 해지는 것처럼, 나에게 복수를 당한 사람들은 끝없이 고민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어째서 사라져 버린 걸까. 왜 연락을 끊어 버린 걸까. 미안해진다. 누군가는 나를 찾아 용서를 빌려고 혈안이 된다. 나는 받아 주지 않고 끝까지 잠적한 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 그림을 파괴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한 복수였다. 그 그림에서 내가 빠져나가 버림으로써 그들의 인생 그림도 완성될 수 없게 철저히 복수하였다.
왜 용서를 해야 하는가
참여하고 있는 북클럽 활동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있다. 주인공은 네흘류도프 공작이라는 귀족 남자다. 그는 청년 시절 고모집에 만난 16세 소녀, 카튜사를 유혹해 동침하곤 곧 떠나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의례히 돈 있고 힘 있는 귀족 청년들은 다들 그렇게 그보다 더한 일을 벌이며 방탕과 쾌락의 삶을 좇는 것을 보니, 어린 소녀를 상대로 한 자신의 무책임한 욕구 해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져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된 그는 그 재판이 자신이 동침했던 카튜사가 살인과 절도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가 자신과의 동침 결과로 임신을 했었고, 그 때문에 고모집에서 쫓겨나 결국은 아이도 잃고 하녀 생활을 전전하다 창녀의 삶을 사는 존재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남 따라 외부에 기준을 두고 살았던 삶이 이끌어간 처참한 결과에 뼈아픈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무죄가 틀림없어 보이는 카튜사가 유죄 선고를 받는 것을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고, 카튜사를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그리고 카튜사의 구명을 위해 원로원에 상소를 올리고 황제에게 청원서를 내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본다. 하지만, 상소는 기각되고 카튜사는 재판 판결대로 4년 중노동형을 살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나야만 한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카튜사를 끝까지 돕고, 카튜사와 결혼하여 그녀를 타락에서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베리아로 따라가는 희생을 한다. 시베리아로 함께 가서 카튜사를 보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중노동형을 살며 병들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부당한 고통을 본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회 전체의 모습에 눈뜨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결국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고, 황제로부터 그녀의 사면장을 받아낸다. 마침내 카튜사가 네흘류도프의 진정한 뉘우침과 희생에 감복하고 그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되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 감옥소에서 만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 지난날 잘못에 대한 책임감이나 희생이 아닌 -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소설의 마지막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카튜사와 마지막 만남을 갖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성경 - 마태복음 -을 읽으며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에 대해 죄 사함 받은 죄인임을 매 순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럴 때에만- 자신이 용서받은 인간임을 자각할 때만- 인간이 타인의 실수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것. 한 번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없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진짜 사회는 법과 제도로 사람의 죄를 따지고 벌주는 그러면서 법을 휘두르는 높은 사람이네 뽐내는 자신들은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한 그런 사람들이 만들에 가는 게 아니라는 것. 타인을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는 것.
깨달음을 얻는 네흘류도프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네흘류도프와 함께 나도 깨달음을 얻는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없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내가 크게 용서받았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못되고 독한 복수를 한 것도, 미움과 원망을 쉽게 품고 내내 품고 살았던 것도, 나 자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남 탓을 해온 것도,...
물론 용서받았어도, 타인을 용서할 마음이 저절로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용서받았으면 용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이치라는 분명한 말을 들었다. 내가 잘못한 것들을 거듭 생각하고 부끄러워해야 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도.
내 안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있는 이유를 오늘 깨달았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들쑤셔 학대하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타인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 수치와 죄를 덮고 감싸줄 때, 내 안의 수치심과 죄책감도 깨끗이 덮어지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값없이 조건 없이 사랑할 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성경이 말하는 원리를 나는 오랫동안 몹시 불쾌하고 찝찝하게 생각했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따지고 정리하기도 바쁜데, 나를 죄인 자리에 놓고 시작하는 것이 싫었다. 나를 그런 냄새나고 더러운 자리에 놓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신인지 인간인지도 모르겠는 이상한 존재에게 섣불리 내 자아를 굴복시키고 의존하려는 못난 짓 같아, 성경에 '죄인'이라는 단어만큼은 정말 없었으면 싶었다.
이제 네흘류도프의 마음에 선명히 나타나 자리 잡은 진리가 내 마음에도 다가와 자리 잡는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이 용서와 사랑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진리가 내 영혼에 진한 글씨를 남긴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기에 기꺼이 냄새나고 더러운 '죄인'의 이름을 택하겠다는 뜨거운 의지가 내 안에 숨어있던 지혜로운 용기를 일으킨다.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알 것 같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jeffjacobs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