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늪에서 길을 찾다
저는 저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많이 꺼리는 사람입니다. 저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사람, 저라는 사람을 훤히 파악한 듯 자신하고, 이리저리 전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합니다. 특히 제 감정과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지 않는 사람, 경계선을 무참히 침범한 사람은 배신감과 원망을 오래 느끼게 만듭니다.
저는 때때로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기도 하지만, 제 삶과 마음과 감정이 담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쉽게 뉴스거리 가십거리로 여기는 사람과는 오래 관계를 맺을 수가 없고, 그런 사람은 반드시 제 마음에서 잘려 나갔습니다.
인간관계 단절.
문제는 그것으로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의 행동과 그것에 반응하는 내 감정은 잊히지 앉고 계속 남아 생각으로, 악몽으로 문득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트라우마로 남아 버린 거예요.
그것은 제가 수치심에 너무나 취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외롭기 그지없습니다. 곁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리성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가, 안심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보편적 사회적 기준에 끼워 맞추려고만 하는 어른들.
게다가 남녀차별이 심했던 가부장적 환경,
전쟁을 겪은 세대, 부모님 자신들의 심리 문제들,
그리고 가정과, 학교, 사회 곳곳에 도사리던 각종 폭력…
그 모든 것들은 아이의 자아상과 정체성을 심히 손상시키고 맙니다. 내 모습 그대로 괜찮은지, 내 마음 이대로 표현해도 되는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래서 마음을 숨기는 사람, 딱 그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공감과 이해에 대한 심한 갈증은 성급하게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 의존증’이 되고 맙니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예의 바르다는 평을 듣는 저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문제들이 마음 한가득이었지요.
저는 저 자신과 타인 사이에 겹겹의 벽을 두었어요. 저는 저를 함부로 판단하고 막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제가 세운 두터운 벽 뒤로 숨었어요. 누군가에겐 갑자기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죠. 수치심을 깊이 자극하는 사람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어요.
도망 다니는 삶.
그것은 점점 굳어져 저의 성향이 되고 성격이 되고 말아요. 내 마음이 '아무나' 앞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 이런 성향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한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제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 깊이 저를 옭아매고 있던 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괴물이었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 방송을 보다가, 브레네 브라운 심리학 박사의 테드 강연을 들었습니다. ‘수치심’을 주제로 하는 강연이었어요. 수치심에 관해 오래 연구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브라운 박사 본인이 큰 수치심을 느끼며 힘들었던 시기에 그분을 그 늪에서 구해준 것은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긴 말이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들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경기자가 이래야 했었는데, 저래서 넘어졌네, 이랬니 저랬니 지적질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경기장 안에서 뛰며 얼굴이 먼지와 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사람이다.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은 잘되면 이기고, 못되면 진다. 하지만 그가 실패하고 지더라도 그는 대담하고 대단하게 진다
브라운 박사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비평가들의 99%는 우리 자신이라고요.
“자격 미달’이라고 나를 모욕하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요.
넌 자격이 안돼. 너 박사 하다 포기했던 놈이잖아. 너 네 와이프한테도 버림받은 놈이잖아. 난 네가 네 아빠 출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거짓말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알아. 난 네가 어릴 때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 알아. 난 네가 외모 컴플렉스가 있는 것도 알아. 넌 너 자신도 의심하잖아. 너는 부모 사랑도 못 받고 컸지…
이렇게 수치심 괴물이 나타나 못된 말을 퍼붓기 시작할 때,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스타워즈 영화에서 한 캐릭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you strike me down I will become more powerful than you can possibly imagine. (네가 나를 쳐서 쓰러뜨린다면, 나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더 강해질 거야.)
이 말은 저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조그만 공격에도 너무 쉽게 놀라고, 너무 빨리 도망치고 숨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어떤 공격을 받아도, 더 강해질 뿐이라고 마음먹습니다.
내 안에 수치심을 허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지만, 이 수치심의 공격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바로, 보편적 기준 사회적 기대라는 거대한 집단 사고 문화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자꾸 남과 비교하게 만드는, 강하게 우리 삶을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적 기준입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내 안에 수치심을 쌓아요.
외모가 부끄럽고, 학벌이 부끄럽고, 직업이 부끄럽고,
부모가 부끄럽고, 형제가 부끄럽고, 자식이 부끄럽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자격 미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 보편적 기준, 사회적 기대라는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어요.
이 사회는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는 제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랑할 거예요. 이렇게 마음먹고부터 제 내면에 대해 자신감이 점점 자라고 있어요. 이제 털털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인척 연기하고 살지 않아요.
저는 또한 타인의 인격 문제를 내 안에 끌어들이지 않도록, 저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를 존중하지 않고 막말하고, 뒤에서 험담하고,…
그것은 분명 그 사람 자신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아무나’에게 마음을 보이고 의지하려 했던 것은, 나의 ‘사람 의존증’ 문제가 맞습니다. 아무나에게 진실한 마음을 함부로 보였던 건, 사람을 신뢰하기 힘들고, 진실된 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는 제가 사람이 너무 고파서, ‘관계 의존증’을 가지고 있었던 탓입니다. 아직 친구가 아닌 사람들을 억지로 친구로 여기려는 성급함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가십거리를 던져주는 사람이 되었던 거예요.
지금은 사람의 이해가 고픈 마음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온 힘 다해 제 마음의 길을 찾아 탐험하는 중입니다.
수치심이라는 큰 늪을 지금 막 빠져나온 느낌입니다. 잘하고 있고, 옳게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있습니다. 밤하늘을 비추는 등불,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는,
굳건한 중심이 이제는 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글이, 여러분 안의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데, 등불과 나침반으로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찾아와 하트온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영상 에세이 형식으로도 보실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Zmd3DPItc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