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이 올 때마다 거대한 산을 넘어가는 기분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어느새 지나간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수차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기말고사를 담담히 치러냈다. 이번 기말고사를 치면서 가장 신난 사람은 유경이었다.
"문제가 풀리는 거 내 처음 경험했다. 내 이번 시험 쫌 잘 본 것 같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와 수민이 천조를 붙들고 앉아 무슨 문제에 무슨 답을 했는지 끈질기게 탐문하던 유경이 결국 입가에 함박웃음을 맺고 방금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아마도 이번에 나만 성적이 떨어졌을 것이다. 자꾸 편지가 쓰고 싶어서, 암기 과목을 전보다 완벽하게 공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인정하고 그 결과를 각오하고 있었다. 전엔 암기 과목을 철저히 외웠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문제집들을 다 풀 수 있다는 만족감이 들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면, 이번 기말고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교과서와 노트를 훑어내리는 정도, 딱 그만큼만 공부한 후에는, 나는 최강에게 편지를 끄적거리다 마음이 편하게 풀어지면서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기분은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느낌에 도무지 시험 결과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매사에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젠 쓸모없는 허물처럼 벗겨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시험은 지나갔고, 아이들은 방학이 시작되는 오늘부터 뭘 할 건지 서로 수다 떠느라 교실이 떠나갈 지경이었지만, 그것조차 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이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장 머하노? 선물 싸나? 누구한테 줄 껀데 이래 화려하노? 하트도 달고 리본도 달고 장난 아이네..."
방방 뛰던 유경이가 갑자기 뭔가 이상한 그림이다 싶은지, 내가 선물 싸는 데 관심을 보였다.
"연예인 줄 끼다."
"연예인 누구?"
"있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마라. 알면 다친다."
"와, 반장, 니 그새 연예인 오빠 쫓아다니는 빠순이 됐나? 이런 모습 적응 안 된다. 반장 이라지 마라. 반장 니는 시험 끝나도 책 읽는 아 잖아."
"반장이 별 거가? 반장도 인간이다. 그라고 2학기 때는 내 반장 안 할 끼니까니 이 지긋지긋한 반장 자리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야, 반장. 그래도 지금 애들 조용히는 시켜야 될 것 같아. 선생님 10미터 전."
화장실 갔다 오던 수민이의 귀띔에 나는 후다닥 선물 싸던 것을 책상 아래 빈 서랍에 밀어 넣으며,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조용히! 쌤 오신다."
"아, 인자 원래 반장 같네. 내 요새 니 모습 완전 적응 안 돼가 식겁했다."
천조가 옆에서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니는 적응되는 줄 아나? 네가 지금 학생이가 식당 아지매가."
오늘도 백만이 오빠 화실에서 작업한다며, 음식 해준다고 학생이 가방에 각종 해산물 식재료와 아이스팩을 가득 채워온 주제에 천조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은 없다 싶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직이 받아쳤다. 곧 선생님이 들어와, 나는 일어나 차렷 경례 인사를 호령하느라 천조와의 티격태격은 거기서 끊어졌다.
선생님은 고등학생 방학은 방학이 아니라 공부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며, 모두 부족한 과목 학원 끊어 다니라고, 방학 끝나고 개학날 얼마나 공부되어 있는지 확인 시험을 칠 예정이라고 엄포와 협박을 잔뜩 늘어놓으셨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무리 쌤들이 누르고 제압해도 향긋한 여름 방학 공기에 붕 뜬 방년 처자들의 마음이 여름 열기에 무성해진 초록 이파리처럼 사방팔방으로 번져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꿈 모임은 8월부터 이어가기로 하고 오늘 7월 21일부터 열흘간은 실컷 먹고 자고 놀기로 했으므로, 모임 멤버들은 종례가 끝난 교실을 떠나지 않고, 그 열흘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떠드느라 신이 났다. 나도 어차피 선물 싸기 마무리를 해야 해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는 대신 화실에 들릴 예정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엄마에게 이미 오늘 시험 다치고 천조나 수민이 집에 놀러 갔다 올 지 모른다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연막을 쳐놓고 나왔다.
"내 그동안 지인짜 공부 열심히 해서, 내 오늘은 진짜로 제대로 놀고 싶다."
"뭐하고 싶어?"
유경이 오늘은 제대로 놀 거라 선언하자, 수민이 옆에서 관심을 보였다. 유경이는 뭔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한 번 놀고 싶다. 내가 원래는 오늘 같은 날, 부대 앞이나 광안리 같은 데 가서 날라리들하고 까대기 치고 놀았던 몸 아이가."
"까데기가 뭐야?"
"헌팅"
"헌팅? 사냥?"
"수민아, 니 이것밖에 안되나! 니한테 실망이다. 니가 부산에 온 지가 몇 년인데, 이런 살아가는 데 진짜 중요한 부산말들을 모르노! 까대기 헌팅이란 즉, 마음에 드는 남자를 즉석에서 꼬시가 같이 노는 거!"
"아... 알아 알아... 기억났어. 내가 기말고사 공부 너무 열심히 해서 잠시, 정말 잠시 잊고 있었어."
"이기 바로 네가 아무리 아닌척해도 뼛속까지 모범생이라는 증거다."
"야, 어떤 모범생이 남친이 있대?"
"누가 남친 사기는데?"
"나. 나, 남친 생겼어!"
"머? 언제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갔노? "
수민과 이야기를 이어가던 유경이 수민이 남친 생겼다는 말에 놀라 펄쩍 뛰었다.
"그때 니 학원 친구 옆구리 찔러 가 소개팅했다던 가 말하는 거제."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는 천조가 몸을 돌려 물었다.
"니 남대문 말하는 기가? 별로라 안 했었나?"
나에게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근데 걔가 나 좋다고 계속 편지 보내고,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그러는 거야. 내가 감동했잖아."
우리가 다 같이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집에 안 가고 교실에 남아 있던 몇몇이 우리에게 갑자기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무슨 발광이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오늘 나오라 케라. 비도! 남자는 순진한 모범생 느그들보다 경험 많은 이 언니가 바 주야 된다!"
"광안리에서 만나기로 했어. 같이 갈래? 내가 내 친구들도 같이 갈지 모른다고 했어."
우리는 누가 보건 말건 아랑곳 않고 또 한 차례 꺄악 소리를 질렀다.
"나도 오늘 광안리 화실 가는데. 백만이 오빠 밥해주러..."
"나도. 나는 연예인한테 선물 주러..."
천조와 내가 짠 듯이 리듬에 맞춰 대답하자, 유경이 뭔가 눈치를 챘다는 듯 넘겨짚었다.
"니, 그 연예인이 혹시 최강?"
"니 몰랐나? 이것들 편지 주고받고 난리도 아이다 요새. 최강이 가끔 집에도 데려다주는 것 같던데, 맞제 반장."
유경이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과장스럽게 놀랐다는 걸 표현했다.
"알고 보니, 여서 내가 젤 모범생이네!"
"그러니까 니 혼자 시험을 잘 본 거지. 모범생은 성적으로 보답받는 기다."
유경의 말에 천조가 삶의 지혜라도 깨우친듯 확신에 찬 태도로 대답했다.
"느그들, 다 너무 날라리 호박씨다. 내가 얌전히 공부하는 동안, 다들 연애질 하느라 정신없었구만!"
우리는 다시 한번 괴성을 질러대며 깔깔 웃었다.
"니네 다 강안리에 남자 만나러 가네. 와, 나 너무 충격받아서, 집에 가서 누버서 티브이나 봐야 될 것 같다."
"머라카노. 유경아 니도 같이 강안리 가자. 다 같이 모이가 파티하자. 수민이 남친도 바 준다매."
우리 모두 충격받아 털썩 주저앉는 유경이를 일으켜, 학교에서 나와 강제로 버스에 태우고 광안리로 향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바닷가에서 놀기 딱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2시간 후에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천조와 나는 화실 앞에서 내리고 유경이와 수민은, 광안리 바닷가 쪽으로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놀랍게도 천조는 해물탕 한 냄비를 끓여내고, 언제 부쳐 왔는지, 각종 전까지 한 상 차려냈다.
"이기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요리가! 혜리야 니 진짜 대단하다!"
마산에 집이 있다는 백만이 오빠는 정말 집밥이 그리운지, 천조가 음식 해 주는 날을 진심으로 기다렸던 것 같았다. 함께 있던 백만이 오빠 친구 두 명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너나없이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작업하던 최강도 어느새 나타나 밥 한 공기를 차지하고 앉았다.
"오빠야 군대 가면, 우리 엄마 밥이 아니라 니가 해 주는 밥이 더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군대예? 언제 가는데?"
"아, 내가 니한테 아직 말을 안 했제. 8월 20 일이다. 영장 나왔다고, 아버지가 연락하시가 며칠 전에 알았다."
백만이 오빠 군대 영장 나왔단 말에, 갑자기 천조의 얼굴이 기절 직전의 사람처럼 파래졌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옆에서 조마조마 눈치를 보며 천조를 달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군대에서도 편지는 주고받을 수 있죠."
"글치. 느그 오빠한테 편지 자주 해라."
"군대 제대하고 복학하면, 느그하고 같은 학년일 수도 있겠다. 느그도 열심히 공부해서 동아대 들어온나."
대학을 함께 다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희소식에, 천조의 얼굴빛이 살짝 밝아졌다.
"오빠 군대 제대하고 올 때까지 제가 기다릴낍니다. 동아대 꼭 드갑니다. 오빠야는 제 낍니다."
"백마이 니 임자 만났네."
"군대 갔다 오는 동안 기다리 줄 여친 생깄네 백마이"
백만이 오빠는 당황해 사래가 걸리고, 옆의 친구들은 키득 거리고 난리가 났다.
"아... 이 맛있는 음식들이...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다 오빠를 향한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라고 제 이름 사실 혜리 아입니다. 그건 친구끼리 부르는 별명이고 제 이름은 천조입니다. 우리 부모님도 돈 좋아하시거든예. 천조와 백만. 약간 돈 액수를 설정하는데 배포의 차이는 있었지만, 제가 볼 땐 우리가 이름과 집안 가치관까지 잘 통하는 천생연분입니다."
백만이 오빠를 제외한 남자들이 다 예상 못한 전개에 웃음이 연발로 터지니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조는 그냥 직진이었다. 역시나 목적 앞에서 주저나 망설임 같은 건 없는 아이, 마음먹은 건 뭐든지 이루어 낼 아이라는 걸 다시금 확신하며, 나는 그녀의 용기와 도전에 마음으로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갑자기 해물탕이 너무 매운지, 귀까지 빨개진 백만이 오빠는 더 이상 밥을 먹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헤벌린 채, 천조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