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하늘이 천조의 슬픔에 더 재를 뿌리려는지, 갑자기 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천조는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잘 뜨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백만이 오빠가 천조는 지금도 미래에도 '요리 잘하는 귀여운 친동생 같은 아이'라고 못을 박아 버린 탓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직진이었던 만큼, 모든 최선을 다 했던 만큼, 그녀는 실연의 아픔도 화끈하게 화실이 떠나가라 눈물 한 바가지 쏟고 끝냈다.
"원래 첫사랑은 안이라 진다 카는 말이 맞네."
천조는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경험한 양, 덤덤히 받아들이며 마음을 추스르는 것 같았다. 두 시간 있다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한 수민이와 유경이와의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우리가 하도 나타나지 않으니, 수민이 새로 사귄 남친과 그의 친구 두 엇을 끌고 유경과 함께 화실에 들렀지만, 곧 화실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음에 제대로 뭉치자는 기약을 남기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나마 이 와중에 얼핏 본 수민이의 새 남친은 뭔가 진중해 보이고 성숙한 느낌이 있어, 적어도 외모적으로 여리하고 여성스러운 수민이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대학생 형들이 몹시 어색해하다가 떠나버리고, 최강은 화실을 들락날락 왔다 갔다 하더니, 뜨거운 자판기 커피를 어디서 두 잔 뽑아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괜찮냐고 눈으로 물어보는 최강에게, 나도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나도 이렇게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우는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나는 천조에게 커피를 내밀며 달래 보았다.
"여기 남강이 뽑아 온 커피 좀 마시 바라."
천조는 서러운 울음을 우느라 격해졌던 숨을 가다듬고,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마셨다.
"우리끼리라도 바닷가 가서 좀 걸으까."
"아니, 다음에."
"그럼 집에 가까."
"어. 근데 내 집에 안 간다. 이래 눈 퉁퉁 부가 집에 가면 우리 엄마가 꼬치꼬치 캐물을 끼라서, 할매 집에 갈란다. 우리 할매는 눈이 마이 나쁘시거등."
"할머니 댁 어딘데. "
"수영. 여서 두 정거장만 가면 된다."
"51번 같이 타고 가면 되겠네."
최강도 후다닥 챙기더니, 우리와 함께 화실을 나섰다.
"남강, 미안타. 니 오늘 내 때문에 억수로 불편했제. 내가 어지른 부엌도 치워주고, 아까 커피도 진짜 고마웠다."
천조는 마음이 좀 많이 편해졌는지, 차분한 얼굴로 화실을 둘러보며 최강을 향해 말했다.
"별 것도 아닌데 뭐. 힘내라."
최강은,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차마 어색한지 한 마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힘내라는 그 짧은 한마디가 천조에겐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 있으니까 억수로 좋네. 내 부산 와서 성공했다 그자. 친구들한테 위로도 받고."
"니는 어딜 가서 뭘 해도 성공할 거다. 그리고 앞으로 더 멋진 남친도 생길 거고."
"고맙다 반장. 오늘까지만 울고 힘낼 끼다. 내 인생에 다시 안 올 낭랑 18세의 여름, 청춘을 신나게 불태워야지."
이 와중에도 여름을 신나게 보낼 계획을 짜고 있는 천조가 신기하고 재밌어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낭랑 18세의 여름, 청춘을 불태운다는 말이 특히 웃겼다.
"천조 참 강한 친구 같아. 언제나 용기 있게 도전하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바로 오뚝이처럼 일어설 그런 사람 같아."
천조가 두 정거장 후에 내리고 최강이 한 말이었다.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보면서 깨닫고 있는 게 많아. 난 참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
"전혀 아닌데. 넌 다른 사람들을 많이 배려하는 좋은 사람인데."
최강의 자기 비하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뭔가 힘이 될 만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내 말에 최강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이상하게 그 표정이 몹시도 처연해 보였다. 그의 마음이 좀처럼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아, 나는 서둘러 그의 마음을 붙잡아 두겠다는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정말 화실에 폭풍이 휘몰아쳤던 느낌이다. 이런 전개가 펼쳐질 줄 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나도. 진짜 이런 상황은 화실 생활 1년 동안 첨 봤어."
"참, 니, 내 선물은 풀어 봤나."
"아, 맞다. 나 아직 네 선물도 못 풀어 봤다."
"확실히, 니도 정신없었네."
"지금 풀어 봐도 돼?"
"아니. 나중에 집에 가서 바라. 그리고 내 선물 마음에 들었는지 답장 꼭 쓰고."
"진짜 궁금한데."
"그럼 니 혼자 살짝 보든지."
최강은 몸을 앞으로 향하곤, 가방 안에서 내가 준 선물을 꺼내 조심조심 풀어 보았다. 선물을 열심히 풀던 그는 내용물을 꺼내 펼쳐 보더니, 정확히 3초 후에 목을 뒤로 젖히고 버스 천장을 향해 기가 차다는 탄성을 질렀다.
"야, 내가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니냐?"
내가 최강에서 선물한 것은 '너의 연예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지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였다. 입고 다니기를 바랐다기보다, 길 가다 이 티셔츠를 본 순간, 최강을 웃길 수 있겠다 싶어 산 것이었다. 예상대로 최강은 웃었고, 나는 그걸로 선물을 한 의미를 얻었다. 그럼 된 것이었다.
"화실에 올 때마다 입어라. 검사한다."
"안 입으면"
"안 입을 때마다 한 대!"
"까짓 한 대 맞고 말지 뭐."
"억수로 아플 건데. 동우한테 물어 바라. 내 손매가 얼마나 아픈지. 아니 지금 함 맛 비 주까?"
"아냐 아냐. 입을게. 지금 입는다 입어."
최강이 교복 위에 셔츠를 덮어 입었다. 덕분에 우린 버스 안에서 내내 낄낄거리고 웃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쯤 비는 더 거세져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최강과 나는 길 건너편 편의점을 향해 달렸다.
"우산 하나 사 올게 잠시만."
나는 편의점 차양막 아래에 서서, 우산을 사 오겠다고 안으로 들어간 최강을 기다렸다.
내 앞에 익숙한 검은색 자동차가 물을 튀기며 갑자기 정지했다. 창문이 내려지고 잔뜩 찌푸린 아빠 얼굴이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최강이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더니 우산을 펼쳐 나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아빠가 차에서 내려 빠른 속도로 걸어왔다. 다음 순간 날아올 것이 무서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탁 소리가 탔는데, 누가 맞은 것일까. 나는 아닌데, 최강을 때린 걸까? 나는 그제야 눈을 떠서 상황을 살폈다. 최강이 아빠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뭐꼬, 이거! 나라, 좋은 말 할 때. 왜 니는 집에 안 들어가고, 어두컴컴한 시간에 이런 놈하고 비 맞고 돌아다니고 있는 기고?"
아빠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최강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 분이 아버님이 시구나. 도를 믿으세요 아버님? 따님 등 뒤에 조상이 한 분 따라다니는 게 보여서요. 따님하고 아버님이 같이 조상한테 제사 지내시면 더 효과 있거든요. 제사 한 번에 10만 원. 저를 따라오시죠. 여기서 가깝습니다."
아빠는 갑자기 얼빠진 얼굴이 되더니, 최강을 아래 위로 천천히 훑다가 '너의 연예인'라고 쓰인 티셔츠 글귀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인마 이거... 정상 아이네... 이 미친놈이 머라 카는 기고?"
"아빠, 도 믿으라 카는데요. 무슨 진리회 그런 건 거 같은데... 아빠 따라가서 제사 지낼 거예요?"
"미칬나. 길에 이런 미친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미친년 맹크로 비 맞고 처돌아댕기고 있나. 빨리 차 타라."
나는 잔뜩 얼어 아빠 차에 타고 최강에게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그런 내가 찌질하게 느껴져 너무 싫었다. 그냥 친구라고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부조리로 너절한 부녀 관계도, 나를 믿어주지 않고 달려와 손찌검부터 시작하는 아빠도, 다 싫었다. '너의 연예인' 티셔츠를 우스꽝스럽게 입고 졸지에 길에서 '도'를 파는 사람이 되어버린 최강을 떠올리니 헛웃음만 났다. 그 애에게 집까지 쓰고 갈 우산이 있었다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니 오늘부터 방학 아이가?"
"네."
"일찍 마쳤을 거 아이가. 와 이리 늦게 집에 가노? 점 마 저거 니가 모르는 놈 확실하나."
"학교 끝나고 친구들하고 같이 있었어요."
"니, 정신 차리라. 세상은 전쟁이다. 한 눈 팔지 말고 학생은 공부만 하는 기다. 알겠나!"
"네."
아빠는 집에 가는 5분여 동안 두려움과 분노가 저기압과 고기압으로 만나 천둥 번개가 터지는 느낌으로 절대 다른 데 관심 끄고, 공부만 하라는 이야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은 끝에 규칙을 하나 세우셨다.
"여름 방학 동안, 니는 밖에 나가는 일은 동우하고 같이 도서관에 갈 일 밖에 없다. 친구들도 만나지 마라."
평소 같았으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다. 생각할 사람이 있고, 편지 쓸 사람이 있으니 아빠의 잔소리 한마디쯤은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최강과 아빠가 그렇게 그런 식으로 만났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싫었다. 나는 한바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감정을 터뜨려야 했다. 나도 천조만큼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는데, 나는 천조처럼 떳떳하지가 않았다. 천조는 최선과 용기를 다하고 결과를 수긍하는 당당하고 멋진 눈물이었다면, 나는 아버지 앞에서 두려워 얼어붙는 겁쟁이인 내가 부끄러운 눈물인 것이다. 그런 나와 아빠 사이의 긴장감을 이기고 자연스럽게 인사할 수 없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연극해야 했던 최강이 느꼈을 마음의 짐이 미안하고 창피한 비참한 눈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