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름방학 (1)

[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by 하트온

동우와 나에겐, 방학 시작하고 열흘간이라는 시간이 영겁 그 자체였다. 동우는 만화를 볼 수 없고, 그릴 수 없어서. 나는 만나 이야기할 수 없어서. 무려 인터넷이 없던 구석기시대였던 것이다.


심지어 동네 도서관마저 공사 중이라, 방학 동안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공고가 붙어 있었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기껏해야 문방구나 서점, 분식 가게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을 함부로 쓰고 다닐 형편은 못되었다. 8월부터 화실을 나가려면 차비와 비상금 정도는 모아 두어야 했기에 용돈을 많이 받지 못하는 동우와 나는 별로 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집에 있는 걸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린 일단 밖에 나왔다. 둘이서 여름 땡볕에 지친 들개들처럼 어슬렁 동네를 배회하다, 발걸음이 저절로 동네 서점 안으로 향했다. 일단은 시원해 보였고, 아무나 들어가도 될 것 같았고, 만화책 광고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우는 바로 만화책 코너로 직진했고, 나는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최강"

"어,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김영애 쌤이 서 계셨다.


"뭐 특별히 찾는 책 있어?"

"아니요. 너무 심심한데 갈 데는 없고 해서... 선생님은 어쩐 일로 저희 동네에?"

"여기 구청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요즘 신간 책들 뭐 나왔나 보려고 들렀어."


김영애 선생님은 몹시 더운지 땀을 흘리며 연신 들고 있는 서류 봉투로 부채질을 하셨다. 선생님을 이렇게 가까이 코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머리카락이 부채 바람에 날릴 때마다, 왼쪽 얼굴을 타고 내려 오는 얼룩덜룩한 흉터가 얼핏 얼핏 보였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절망했을 19살의 선생님을 생각했다. 같이 탤런트 연예인이 되자고 했던 분은 지금 방송에 나오는 유명인이시라는데, 선생님은 방송에서 그분을 볼 때마다 어떤 기분이실까 생각했다. 선생님이 다시 일어나 진로를 바꾸고 세상으로 나가시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다잡아 먹으셔야 했을까. 선생님은 어쩌면 마음을 강하게 키우는 방법을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마음이 강해지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해요?"

"마음이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려면 먼저 건강해져야지."

"어떻게 하면 마음이 건강해지는데요?"

"우리 반장 질문이 엄청 심오한데? 야 우리 너무 더운데, 여기 앞에 제과점에서 팥빙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제과점은 서점보다 더 시원했고, 팥빙수까지 하나씩 앞에 놓고 앉으니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여름 방학 시작하고 처음으로 신난다는 쾌감을 느꼈다. 동우 녀석도 신나서 푹푹 얼음을 떠먹으며 자신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선생님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말씀을 이어가셨다.


"건강해지는 첫 단계는 사랑을 많이 받아야지. 나를 돌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아프고 약한 데를 찾아서 치료도 하고."


사랑하고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


"마음 치료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우선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느끼고 설명을 할 수 있어야지."


선생님은 이런 질문에 벌써부터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막힘없이 대답을 하셨다. 어른이 되면 이렇게 마음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걸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어른이 되면 자기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치료도 잘하고 건강하게 되는 거예요?"

"아니. 어른이라고 다 마음에 대해 잘 아는 것도 마음이 건강한 것도 아니야. 자기 스스로 의지가 있는 사람만 그럴 수 있는 거지. 운동하고 다이어트하는 것도 의지가 있는 사람만 해 내는 것처럼 말이야."

"선생님은 그런 의지가 있으세요? 마음이 건강해지고 싶은 의지."

"나는 강제로 그렇게 그런 의지를 가져야 하는 상황이 왔었지. 선생님 교통사고 났던 이야기 지난번에 수업 시간에 했었잖아. 그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슬퍼서 내 마음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거든."

"선생님, 저도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나는 선생님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다 말씀드렸다. 부모님과의 관계부터, 며칠 전 있었던 최강과 아버지의 마주침까지.


"나를 믿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마음을 누군가 안전한 사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부터 치료의 시작이야. 그러니까 넌 지금 네 마음을 위해 엄청 좋은 일을 시작한 거야. 선생님이 뭐든 말해도 안전한 사람이 되어줄게. 희망을 잃지 말고, 마음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함께 노력해 보자."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반장도 눈물이 많네. 그래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라."


김영애 쌤께 마음을 다 쏟아놓고, 쌤의 다정하고 친절한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동우는 팥빙수를 다 먹고, 어느새 일어나 제과점을 둘러보며 빵 구경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오늘 기분이다! 빵 사줄게. 너희들 먹고 싶은 거 골라 봐."


김영애 쌤이 사주셨던 그 팥빙수와 제과점 빵이 그 여름에 먹었던 가장 맛있는 기억이었다. 8월이 될 때까지 동우와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집에서 해주는 밥만 먹고, 집에 있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가끔 전도 부쳐 주시고, 국수나 라면도 끓여 주셔서, 먹는 것만큼은 큰 불만 없이 지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몹시 집에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


화실에 가는 날 아침, 동우는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를 깨웠다. 나는 너무 신나 부산을 떠는 동우 때문에 아버지의 의심을 살까 조마조마 심장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동우가 기술 좋게 대문을 살살 닫아 붙여 잠그고, 우리는 그대로 달렸다. 사람 없는 여름 아침 시간의 버스는 순식간에 우리를 광안리 화실까지 데려다주었다. 화실에 들어서니, 불이 환했다.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 최강이었다. 정말 너무 많이 반가웠다. 우리를 맞는 최강의 얼굴도 환했다.


"행님, 행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심니데이."

"내가 아니라 만화책이 보고 싶어 죽었겠지. 드레곤 볼 다음 편 나왔어."

"진짜로!"

"그래 진짜로!"


동우는 그대로 일어나, 신줏단지 모시듯 최강에게서 새 만화책을 고이고이 받아 들더니, 구석 자리를 잡고 앉아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래?"

"커피 있나?"

"내가 집에서 일회용 커피 믹스 갖다 놨어."

"진짜로!"
"그래 진짜로!"


최강이 냄비에 물을 끓이는 것을 보면서,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최강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날 괜찮았어? 너희 아버지 화 많이 내셨어?"

"아니. 니 많이 놀랐제? 우리 아빠가 좀......"


아빠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희 아빠 젊고 멋있으시더라. 우리 아빤 훨씬 늙었어. 고생도 많이 해서, 머리도 다 벗겨지시고 벌써 할아버지 느낌 나."

"야 근데, 어떻게 '도를 아십니까'가 그 순간에 나올 수 있노?"

"몰라 나도. 나는 이상하게 뭔가 위험을 감지하면 그런 연기를 저절로 해. 어릴 때부터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땐 어리고 힘이 세지 않으니까 항상 거짓말 연기로 위험을 모면했다쳐도, 이젠 크고 강해졌는데도 거짓말이 쉽게 튀어나오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지나고 후회가 되더라. 아버지께 제대로 친구라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사람 말 들어 보지도 않고 폭력부터 쓴 사람은 우리 아빤데 머. 제대로 된 인사받을 자격도 없다."

"그래도. 거짓말이 쉽게 튀어나오는 건 나의 단점이야. 앞으로 고쳐야지."


냄비 물이 다 끓어, 최강이 뜨거운 물을 커피 두 잔에 나눠 부었다. 타인이 타 주는 커피가 이렇게나 꿀맛 같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뭐했어?"

"동우하고 완전 집에 갇혀 있었지. 도서관까지 닫아서 진짜 갈 데가 없었다."

"구청 앞에 있는 빨간 벽돌 건물 도서관 말하는 거야? 거기 자주 가?"

"여기 화실에 오기 전에는 거기 도서관에 맨날 다녔지. 거기 나름 조용하고 게안타."

"나도 담에 한 번 가봐야겠다. 난 한 번도 안 가봤어."

"방학 동안 도서관 공사한단다. 아마 개학해야 다시 열 걸."

"그렇구나."

"니는 열흘 동안 머했노?"

"나는 삼촌하고 서울 갔다 왔어."

"서울? 왜?"

"할아버지 할머니 다 서울에 계시니까. 철광 삼촌하고 우리만 부산에 있고, 다른 친척들은 다 서울에 있어. 울 엄마 아빠는 원래 서울 자주 왔다 갔다 하시고. 삼촌 하고 나는 학기 끝나기 기다렸다 갔다 온 거지."


난 갑자기 최강이 왜 부산에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너희 부모님하고 최철광 쌤은 어떻게 부산에 오시게 됐는데?"

"우리 삼촌 축구 선수였던 건 들었지?"

"어."

"삼촌 친한 친구 아버지가 너희 학교 이사장님이신데, 삼촌이 축구 그만두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삼촌 친구하고 그 이사장님이 다시 공부하라고 설득해 주시고, 교사 자리까지 알아봐 주신 거지. 우리 아빠하고 삼촌이 좀 특별한 관계거든. 집안사가 좀 복잡한데 암튼 우리 아빠가 삼촌한테 부모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삼촌 부산에 이사 올 때 같이 내려왔어."

"형제간 우애가 엄청 깊으시네."

"그렇지."

"최철광 쌤도 니를 억수로 아끼시는 것 같더라. 느낌이."

"알아. 너무 그래서 귀찮을 정도야."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귀찮을 정도인 것이 무엇인지 나는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항상 딸이라서 아쉬운 존재였고, 매일이 드라마 세트장인 10명이 넘는 대가족 식구들 틈에서 나는 호령하는 아버지 뒤에 병풍처럼 얌전히 앉아 자리를 채우는 말 잘 듣고 온순한 아이, 줄줄이 태어나는 사촌동생들을 통제해야 하는 맡 누이일 뿐이었다. 나의 세상에선, 자꾸 이런저런 의무를 맡기려는 사람은 있어도, 나를 귀찮을 정도로 챙기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내 기억으론 없는 것 같았다.


"부럽다. 최철광 쌤 같은 삼촌이 있어서!"

"넌 귀여운 동생 있잖아. 누나 일이라면 끔찍한..."


동우가 있다는 사실이 점점 나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걸 들으니 기분이 몹시 어색하고 이상했다.


"저게 귀엽나? 니 주께. 니 가지라."


나의 무뚝뚝한 표현에, 최강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동우는 갑자기 들리는 웃음소리에 자동반사적으로 이쪽을 보았을 뿐, 1초도 머물지 못하고, 만화책의 강력한 자기장에 다시 끌려가 버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8. 너의 연예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