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모두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타났다.
"방학이라고 엄마가 내한테 집안일하고 심부름을 더 마이 시킨다 아이가... 내 열 받아서 엄마가 꿍쳐둔 막걸리, 인삼주 다 뜯어 가 낮술 억수로 마싰다. 어젠 막걸리를 옷에 다 쏟아 가 혼자 쑈 했다. 근데 빨래도 내가 다 하니까 울 엄마는 암 것도 모린다... 하루는 술이 다 어디갔노 카는 기라, 내가 할매 집에 갈 때 선물로 들고 갔는데 뻥쳤거든... 근데 울 엄마가 갑자기 훌쩍이면서 '니가 내보다 낫다' 카면서 칭찬해주고 용돈도 주는 기라, 내 완전 양심 찔리가 죽는 줄 알았다..."
천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기찬 모습으로, 쉴 새 없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난 반 성적 30등에, 전교 석차 400등 올랐다고 완전 공주 대접받았다 아이가. 엄마가 모범생은 모범생답게 입어야 된다꼬 새로 옷도 사주고, 가방하고 신발도 메이커 사준 기다. 모범생 패션 직이제!"
유경은 영국 사립학교 교복 같은 체크무늬 옷을 아래위 세트로 입고 나타나, 패션쇼를 했다. 우린 다 속으로 쫌 교복 같은데 생각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잔뜩 들뜬 유경이의 풍선을 터뜨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아... 윤석이 보고 싶다."
수민이는 화실에 들어서자마자 남친의 이름을 부르며 책상에 털썩 엎드렸다.
"왜? 윤석이 어디 갔나?"
"윤석이 지난주에 미국 갔다. 아버지가 교수님인데 안식년이라고 1년 동안 미국에 가 있기로 했대. 어쩌면 윤석이는 이 기회에 쭉 미국에서 대학, 대학원까지 나올지도 모른대."
나의 질문에, 수민이는 제 남친의 근황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나도 미국 가고 싶다."
"니도 미국 가라. 니 영어도 잘하잖아."
"나도 우리 엄마한테 물어봤지. 미국에 유학 보내주면 안 되냐고. 울 엄마 뭐라셨는 줄 아냐?"
"머라 카셨는데?"
"어디 아프냐고. 왜 밥 잘 먹고 헛소리를 하냐고."
수민이는 힘이 다 빠진 얼굴로 허탈한 헛웃음을 웃었다.
"힘내라. 윤석이가 니 마이 좋아한다 아이가. 편지 자주 쓰겠지. 한국에 한 번씩 다니러 안 오겠나."
"편지 쓸 거라곤 했는데... 몰라... 난 벌써 힘들어.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건데. 짱나..."
수민이에게 뭐라 해 줘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데, 최철광 쌤과 김영애 쌤이 9시 정각에 시간 맞춰 입장하셨다. 최철광 쌤은 그동안 잘 쉬고 이발도 하셨는지, 더 깔끔해지셨고, 김영애 쌤도 늘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이셨다. 쌤들은 미리 충분히 의논을 하고 준비하신 듯, 복사한 자료를 나눠주시면서, 한 명씩 다른 공부를 하고 발표하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하자고 하셨다.
"천조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지리 역사를 맡아라."
"네. 좋심니다!"
천조는 원래 지리와 역사를 학교에서도 좋아했다. 이번 기말고사에도 이 두 과목은 만점을 받은 만큼, 천조는 자신만만하게 응했다.
"유경이는 요새 수학 실력이 팍팍 늘고 있으니, 수학을 한 번 맡아서 해 봐라."
"아... 아직 그 정도는 아인데예... 선생님 많이 도와주시야 됩니다."
유경이가 얼떨결에 수학을 맡았고, 수민이는 영어를, 나는 국어를 맡았다.
"남강이는 과학 한 번 맡아볼래? 너 어릴 때 우주 별 이런데 관심 많았잖아."
"나 지금은 학교 공부를 손 놔서 아는 거 없는데..."
"일단 한 번 공부해 봐. 모르는 건 삼촌한테 묻고."
최강은 몹시 귀찮다는 표정이었지만, 최철광 쌤의 말을 거역할 뜻은 없는 것 같았다.
"지는 머하까예?"
"너는 선생님하고 수학 영어 한 시간씩 돌아가면서 공부하고, 네가 배운 걸 설명하는 만화책 만들기. 어때?"
"따봉! 좋심니더!"
동우는 저가 좋아하는 쌤들한테 공부를 배울 수 있다는 것과, 만화를 실컷 그리게 될 거란 사실이 마냥 좋은 것 같았다.
"모두가 해야 할 숙제가 한 가지 더 있는데,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고, 한 편씩 독후감 써오기."
김영애 쌤의 말에 아이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아무도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렇게 시켜주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냈으며, 각자 맡은 공부를 하고, 또 배운 것을 서로에게 설명해 주면서 여름방학을 정말 꽉 차게 보냈다.
나는 특히 최강이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오거나 모형을 만들어 와서 우주와 자연법칙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 과학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드라마에서 과학 선생님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는 연예인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 애의 설명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과학이라는 과목이 이렇게 재밌는 것인지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나는 그 과목 자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이 점점 이해가 되고 더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누나야, 내 이제 수학 문제 다 잘 풀 수 있다. 배운 걸 만화로 그리는 게 신의 한 수였다. 내가 지금 수학을 푸는 기 아니라 누군가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만화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원래 수학 풀 때 눈에 안개가 끼고 그런 현상이 하나도 안 일어 난다. 신기하제!"
"어 진짜 신기하네."
동우의 수학 문제가 해결된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일단 아빠 앞에서 떳떳해 지기 때문이었다. 동우의 학업 고민은 바로 아빠의 고통이기에, 동우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빠의 큰 고민거리를 해결해 준 것이었다. 동우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본 수학 시험에서 92점을 받았고. 아빠는 처음으로 몹시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칭찬하셨다.
"느그 누나 실력이 진짜 대단하네! 니는 앞으로 수학 쌤 해라. 수학 교육학과 가면 되겠네."
"아니요, 아빠. 저는 공대 가고 싶습니다. 전자공학과 가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나도 나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안 어디서 그런 말이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것인지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아빠는 나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조차 못 해 본 상황 앞에서 아빠는 눈만 꿈벅거리셨다.
아빠는 본인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 데다, 주변에 공대 나온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공대라는 것에 대해 '기술자' 정도의 막연한 느낌밖에 없으셨고, 그것을 여자가 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셨을뿐더러, 늘 교대나 약대를 평생 누누이 세뇌시킨 딸 입에서 그런 생소한 말이 나오리라고는 꿈조차 꿔 본 적이 없으셨기에 말문이 완전히 막히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