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강 인생 파이팅!
매일을 차가운 도시락 두 개로 허기를 면하고, 골고루 잘 먹지도, 충분히 쉬지도 못해, 누렇게 뜬 창백하기 그지없는 소녀들의 학예제지만, 오늘만은 발그레한 뺨, 반짝이는 눈빛, 흥분이 들끓는 분위기가 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시멘트 건물 교정에 넘치고 있었다.
날라리들의 고집으로, 우린 모두 무대화장이란 걸 해야 했고, 나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보면 욕을 들을 텐데 생각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날라리들이 더 무서우니 말을 들어야 했다. 공부를 못한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충 사는 것이 아님을 이 아이들을 보고 깨달았다. 춤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되는 것이었다면, 얘네들은 스카이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한 동작도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무대에 오르는 일부터 내려갈 때까지 모든 동선을 하나하나 따져 연습시키는 데, 아마도 이건 군대 훈련이 이런 수준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침부터 무대 리허설만 몇 번을 했는지. 벌써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고교시절의 추억 사진 한 번 제대로 박고 지나간다는 마음으로 꾹 참고 열심히 따랐다. 그리고 가수 댄서 연예인이 되면 어떨까 라는 따위의 꿈도 동시에 접어지는 쾌거도 있었다.
화장을 다 받고 거울을 보니, 날라리들이 눈 주변을 아이라인으로 떡칠을 해 놓고, 눈썹을 숯검댕이, 입도 두 배는 더 커 보이게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못 알아보겠는데 싶어 오히려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서로 얼굴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와, 최대한 춤 동작 순서에 집중하고 서로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날라리들이 무서워 무서워 웃을 수 조차 없는 삶이라니, 세상 곳곳에 부조리가 숨어 판을 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수틀리면 면도칼을 들이대고 더러운 성질을 다 부릴 수도 있는 존재들이라고 미리 겁먹고 웃음까지 참아주는 우리 자신들이 참 비굴한 존재들이구나 싶기도 해서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날 못 알아보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며 순서를 기다렸다. 우리 순서가 맨 마지막이라, 무대 맨 앞 줄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동우가 와서 기웃거렸다. 동우는, 귀신같이 화장 떡칠한 누나들 틈에서 날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동우야!"
문득 동우를 본 천조가 동우의 이름을 부르자, 동우가 우리 쪽을 보고, 누가 누군지 그제야 파악을 하는 것 같았다. 내 얼굴에 시선이 이른 동우는 징그러운 벌레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와, 얼굴 꼬라지, 이기 머꼬?"
"뭐! 무대화장도 모르나 무식한 기! 아빠는?"
"누나 니 어짤래? 할매하고 삼촌 숙모까지 다 왔다. 우리 대가족 다 총출동했다."
"와들 그라는데, 갑자기! 관심도 없는 식구들 니가 바람 여가 데꼬 온 거 아이가!"
"내가 바람 연다고 들을 사람들이가! 이 참에 날씨도 좋은데 다들 나가자고 아빠가 바람 잡았다."
"아, 씨 어짜노! 사람들 앞에서 술집 여자처럼 화장하고 춤춘다고 한소리 하지 싶은데... 아빠가 내 알아보겠나?"
"일단 이래 하자 누나야. 아빠가 못 알아보면, 나는 시치미 딱 잡아떼게. 누나 벌써 앞에 우리 오기 전에 노래 불렀는 갑다 하께. 니는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화장 지우고 옷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나, 알겠제."
"알았다."
우리가 떨어져 날라리들의 백댄서가 된 건,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고 하늘이 도왔구나 싶었다. 날라리들이 워낙 비주얼과 옷차림이 화려하여 시선을 끌 것이고, 우린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희망을 걸었다.
"참가 번호 12번!..."
드디어 우리 팀이 호명되었다. 다행히 10월이라 해가 빨리 지면서, 무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조명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조명 뭐꼬!"
"우리 차례가 해 떨어지는 시간일 줄 알고, 내 친한 야구 선수 오빠들한테 구할 수 있는 조명 있는 대로 다 들고 오라켔다. 내 완전 센스 직이제!"
날라리 중 한 명이 우쭐해서 크게 떠들어 모두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게 되었다. 해가 져 어둑한 데다, 조명에 눈이 부셔, 관중석이 잘 보이지 않아, 누가 어디 앉아 있는지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춤 동작을 맞추는데 열중했다. 노래가 끝나고 관중석의 남자들 환호소리가 우정의 무대 함성 저리 가라 터져 나왔다. 오늘 밤 날라리들이 이 언덕 위 구석진 학교로 끌어들인 남자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걸까. 앵콜 앵콜 앵콜...외침이 끝없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날라리들에게 앵콜은 느그끼리 알아서 해라 귀띔하고 백댄서들을 다 끌고 무대를 내려와 교실로 달렸다.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은 함께 발에 불이 나게 달려주었다. 우린 들어가서 화장을 어떻게 지울까 고민을 하다, 혹시나 싶어 양호실에 들러보았다. 다행히 양호쌤이 그때까지 계셨다.
"쌤, 화장 어떻게 깨끗하게 지워요?"
마음이 급한 내가 다짜고짜 물으니, 선생님이 오히려 당황을 하시는 것 같았다.
"아... 화장... 클린싱 크림은 없고... 바세린 있는데, 이걸로 해 볼래..."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바세린을 받다, 얼굴에 마구 문질러 바르고, 양호 쌤이 주신 클리넥스 휴지로 벅벅 닦아냈다. 몇 번을 닦아내도 아이라인이 깨끗이 닦아지지 않아, 바세린 바르고 클리넥스 닦아내기를 눈 따가워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했다. 그리고 쌤이 시킨 대로 비누로 씻어냈다. 바세린의 기름기가 얼마나 독한지, 비누로 몇 번을 씻어내도 얼굴이 번들거리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우린 양호쌤에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하고, 교실로 달려가 청바지를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청바지는 책가방에 넣고, 우리 모두 단정하고 지루한 교복 차림으로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다.
얼핏 보니, 관람석 가운데쯤에 동우와 식구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김영애 쌤과 수민이 어머니도 보였다. 천조가 엄마 부르면서 달려가는 걸 보니 오늘은 늘 바쁘시다는 천조 어머니도 오신 모양이었다. 유경이도 부모님이 다 오셨다며 신나서 달려갔다. 아이들이 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로 뿔뿔이 흩어져 나도 어쩔 수 없이 내 가족을 찾아가야 했다.
"니 춤 언제 그래 배았노? 머리 좋은 아들은 이것저것 다 잘한다 그자. 그만큼 공부도 열심히 잘하고 우리 최강이는 좋은 대학 갈 끼라."
막내 삼촌이 저렇게 나설 땐 분위기를 띄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아빠 심기가 편치 않다는 뜻일 것이었다. 아빠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앉아 계셨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시더니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행님, 행님..."
불길한 일을 직감한 막내 삼촌이 말릴 새도 없이, 순간 내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만화가 거짓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정말 눈앞이 까매지면서 번쩍번쩍 별이 왔다갔다 했다. 내가 맞았다는 자각도 아직 하기 전인데 눈물샘부터 터져 나왔다.
"니 성적 조금씩 떨어지는 기 이상하다 싶었는데, 가마 보이 가시나가 정신이 빠지 있네!"
"행님 야도 학교에서 반장이고 체면이 있는데 이라지 마이소."
아빠가 손을 또 들어 올리자, 이번엔 삼촌들과 동우가 아빠를 잡고 말렸다.
"형님, 이맘때 아들이 다 이런 거 저런 거 해보고 싶은 거 아입니까. 강이 같은 모범생 없다 아입니까. 한 번 친구들하고 학예제 참여한 긴데 봐주이소."
"아빠, 누나 지금까지 맨날 공부만 하는 거 제가 증인이니까, 한 번만 봐주이소."
"형님, 우리는 오늘 날도 좋은데 포장마차 가서 한 잔 하고 집에 갑시다."
"아이고, 아버님, 화를 내시려면 저희들한테 내세요. 반장은 춤추기 싫다는데 저희가 우겨서 반장이 같이 해준 거거든요."
어느새 나타난 천조가 북새통 틈에서 함께 아빠를 말리며 두려운 빛 하나 없이 나섰다. 언제 왔는지 유경이와 수민이도,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이긴 했지만, 이런 자리에 빠질 수는 없다는 듯 천조 옆에 꿋꿋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빠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여유 만만한 사람들 앞에서는 화가 금방 풀리는 편이었다. 천조의 당당한 태도가 아빠를 무장해제시킨다는 걸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니 이름이 뭐꼬?"
"천조입니다. 이천조예."
"반장한테 그런 거 같이 하자고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케라."
"예 아버지! 꼭 그리하겠습니다! 열심히 해서 함께 좋은 대학 가겠습니다!"
"그래. 빨리 집에 드가라 다들."
아빠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태연하게 방글거리는 천조가 아빠의 마음을 다 풀어놓았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결국 떠밀려 가주는 척 삼촌들과 먼저 학교를 떠났다.
나도 천조처럼 아빠에게, 아니 누구에게든 두려움 없이 다가가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당하고 여유 있는 자세가 온몸에서 새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조건적으로 키워져 종소리만 들어도 겁에 질리는 강아지 같은 태도, 아빠 앞에만 서면 겁에 질려 잔뜩 긴장하는 태도가 길들여져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천조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키워졌다면, 나는 누구 앞에서나 긴장하는 사람으로 키워진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를 그렇게 길들인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가자."
엄마가 와서 가자고 할 때에야 나는 엉엉 울음이 터졌다.
"여서 이라지 말고 집에 가자 누나야. 내 오늘 진짜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너무 힘들었다."
동우는 어린것이 정말 많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목소리였다.
"동우야, 누나들 여기 뒷정리 좀 하고 가야 되거든. 걱정하지 말고 엄마, 할머니 모시고 집에 가 있어라."
천조가 동우를 안심시키고 보냈다. 천조가 동우에게 자기 동생 만조 소개해 줄 거라고 아까부터 별렀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럴 여유가 없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천조가 나서 내 가족들을 다 교통정리하고 집에 보낸 셈이 되었다. 천조가 자신이 달래겠다며 유경이와 수민이까지 각자의 가족들에게 다 돌려보내고 둘이 되자 나지막이 말했다.
"반장, 아까부터 최강이 옷 멋지게 입고 와 있거든. 니 보러 온 것 같은데, 불러주까. 아니면 다음에 화실에서 보자고 전해주까."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관중석 쪽을 두리번거리며 최강을 찾았다. 어딨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쪽 말고 스탠드 구석 쪽"
천조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손짓을 했다. 최강이 운동장 스탠드 젤 꼭대기 위 구석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아래 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더욱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검은 잠바를 맵씨 있게 입은 최강은 정말 오늘따라 멋있는 옷차림이었다.
"최강, 니가 아 저녁도 먹이고 집에까지 잘 데리다 주라. 나는 간다."
천조가 엄마처럼 최강에게 나를 부탁하고 가는 게 웃겼지만, 지금까지 울던 마음은 좀처럼 얼굴에 웃음을 담지 못했다.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진짜 맛있는 저녁 사줄게."
최강이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