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겨울 그리고 봄 (2)

[소설] 최강 소설 파이팅!

by 하트온

언어란 건 삶 구석구석을 덮어주기에 너무 짧고 부족한 담요 한 장처럼 느껴진다. 충분한 듯하다가 한 번씩 이렇게 훅 언어의 이불이 덮어주지 않는 삶의 사각지대가 드러난다. 도대체,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이고,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공간 속의 공간 - 땅을 딛고 서 있어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느낌이 드는 이곳 - 이 어디인지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나는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꽃잎 한 장처럼 공기 중을 천천히 맥락 없이 부유하고 있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첫 키스'라고 부르는 상황이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어느 옛 작가가 표현했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전율하는 낭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게 최강의 행동은 그 순간의 감상에 젖은 충동과, 동시에 고3이라는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 복잡한 상황이 만드는 복잡한 감정과, 벽을 깨고 좀 더 다가갈 수 있을까 관계에 서툴고 미숙한 실험으로 뭉쳐진 뜨거운 덩어리를 내 손에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최강의 행동은 내가 편안한 온도보다 조금 더 뜨거운 것이었다. 내가 너무 춥기 때문에 나는 따뜻한 것과 뜨거운 것을 분별하는 감각이 발달해 있고,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알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뒤집혀 새로운 것이 되어 버린 느낌. 내가 느끼는 혼란이 더 커졌다. 고3. 집안 폭망. 그리고 첫 키스. 결코 평화로운 조합이 아니다. 그런데 그 불편하고 뜨거운 최강이 던진 것을 나는 소중하게 꼭 쥐고 있다. 나는 너무 춥기 때문에. 여전히 최강의 온기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기에. 하지만 동시에 이 관계가 잃어가고 있는 안정과 고요에 혼란과 불안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언어의 이불이 덮지 못하는 이 복잡한 마음의 사각지대, 냉기가 가시지 않는 이 영역을 그에게 전할 길이 없으리라는 절망이 이 관계 속에 벌써 스며 있다. 아 모르겠다. 내가 내 삶에 다가온 이 모든 새로운 상황들에 대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집을 나서 학교에 가는 길에 수민이에게 전화를 했다. 주말이라도 고3에게 편안한 집은 학교다. 수민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었다.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음을 지금 절실히 깨닫는다. 우리 집 상황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공유할 수 없어 그녀를 밀어내었던 것을 속으로 몹시 민망하고 미안해하며 겉으론 짐짓 씩씩한 척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했다.


"혜민! 잘 사나!"

"혜강! 너 뭐야!"


정말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쨍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서 번져 나오는 햇살을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음미했다.


"집에 있네. 니 오늘 집에서 공부하나?"

"나 지금 밥 먹고 학교 가려고. 넌?"

"내 학교다."

"야, 나 너한테 할 말 엄청 많아. 윤석이 한국 나왔었어. 거기 그대로 기다려. 내가 우리 이모가 만들어 준 꽈배기 싸간다. 같이 먹자."

"그래. 니 올 때까지 나는 우리 반에서 공부하고 있으께."


교실엔 벌써부터 와서 공부 삼매경인 아이들이 열 명은 넘게 앉아 있었다. 내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보았지만, 어젯밤의 일이 어른거려 도무지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니다가, 교문에서 가까운 쪽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고개를 뒤로 젖혀 한 칸 위 스탠드 좌석에 머리를 눕힌 채 하늘을 보았다. 뭉게구름이 뭉글뭉글 떠 있는 파란 하늘에, 어느새 나무에 촘촘히 돋아난 하얀 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봄이 온 걸 모른 채 왜 그렇게 내내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까. 하늘을 가리고 내 머리 위에 수민이의 얼굴이 드리워지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혜민!"

"혜강!"

"나 엄청 섭섭해하고 있었던 거 알아?"


수민이 가방을 열어 꽈배기가 든 종이봉투를 꺼내 조심스레 찢어 꽈배기를 꺼내 내밀면서 말했다.


"아무 하고도 말하고 싶지가 않더라. 내 상황을 나 스스로가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 '아무'에 나까지 들어갔다는 게 진짜 섭섭했다니까. 나는 너에게 뭐든지 이야기를 다 하는데."


수민이가 제 입에 꽈배기를 밀어 넣으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할지도 모르겠고."

"그건 말 안 해도 돼. 네 마음이 어떤지가 나는 걱정되고 궁금하고 그랬단 말야."

"어떻게 상황 설명 없이 마음만 말하노?"

"그래도 노력했었어야지!"

미안한 마음이 따갑게 밀려들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야, 윤석이 왔었던 이야기도 너무 해주고 싶었단 말야."

"그래. 윤석이 이야기...... 듣자. 해 바라."


수민이는 윤석이가 봄방학 동안 한국에 다니러 왔었던 것을 쭉 이야기해 주면서, 하얀 볼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동안 편지를 그렇게 자주 주고받았어도, 막상 오랜만에 만나니까 너무 서먹한 거야. 근데, 이제 보고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서럽고 섭섭한 거야. 우리 완전 영화 찍었다니까. 마지막에 헤어지기 싫어서, 윤석이도 울고 나도 울고...... 우리 마지막에......"


나 말곤 아무도 듣는 사람도 없는데, 수민이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내 귀에 대고 키스했어라고 속삭였다.


키스라는 것이 전염병도 아닌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 주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혜강, 정신 차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야? 너 이렇게 순진한 애였어?"


나를 수민이가 흔들어 대는 것을 느끼며 멍한 나락에서 깨어났다.


"어, 미안. 요새 수면부족인지 자주 멍해진다. 충격받은 거 아이다."

"나 윤석이 너무 보고 싶은데. 윤석이는 미국 대학으로 진학할 거래. 자긴 취직은 분명히 한국에 하러 올 거라고......"


수민이는 또 내 귀로 다가와 그때 결혼 하쟤 라고 소곤거렸다.


"와...... 윤석이는 엄청 계획적인 아네."

"그렇더라니까. 걔는 앞으로 계획이 쫙 세워져 있더라고. 몇 살에 결혼하고, 언제 아이를 낳고 그런 것까지 다 생각을 하는 거 같아. 근데, 난 잘 모르겠어. 지금은 윤석이가 너무 좋은데, 내가 윤석이만 기다리면서 살 수 있을까. 난 벌써 괴로운데......"


같은 첫 키스를 겪었음에도, 수민이의 고민과 내 고민의 거리는 너무 먼 것처럼 느껴졌다. 내 고민도 말할까. 수민이가 김영애 쌤과 연결되어 있고 김영애 쌤이 최강의 숙모가 되셨다는 사실이 나의 말문을 턱턱 막았다.


"넌 최강 만나 요즘?"

"전화만 하다가, 어제 만났다."

"정말? 너희 손은 잡았어? 키스는 언제 할 거야? 너희야 말로 키스할 때가 되었지."

"뭔 소리고? 키스는 무슨......"


난 얼굴이 빨개져 수민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아, 이 순진한 기집애. 연애를 하면 당연히 스킨십을 하는 거지."

"연애는 무슨......"

"네가 하는 거 연애야 바보야. 첨엔 너만 최강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우리 이모가 그러는데, 최강이 너 엄청 좋아하는 거 같대. 이모가 청소하다가 최강 스케치북을 발견했는데, 소녀 그림들이 잔뜩 있어서, 누군가 보니까 너더래. 네 그림만 엄청 그리는 것 같다고. 그리고 보통 오래 그려온 게 아닌 것 같대. 그래서 그동안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것 같다고. 이거 절대 최강한테 말하면 안 된다. 우리 이모가 절대 함구하라고 신신당부했거든. 명세기 숙모가 몰래 시조카 방 뒤지고 훔쳐보는 가벼운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나......"


수민이 전해 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심장이 빠른 속도로 드럼 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하얀 솜사탕으로 채워지는 이상한 감각들이 잇따랐다.


최강이 나를 그린다는 건, 나를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되었다. 내 모습을 스케치북에 옮겨 놓는다는 건, 나만큼 최강도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도 생각되었다. 충동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행동이 진심일 거라는 믿음이 견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최강이 너무 보고 싶었다. 뒤늦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전율이 밀려왔다. 결국 그 옛날 시인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한 사람만 좋아하는 건 짝사랑, 둘이서 동시에 좋아하는 건 연애. 둘이 좋아해도 연락이 안 되면 상사병. 그런데 너희 둘은 전화 통화를 하고 심지어 어제 만났으니까, 연애를 하고 있는 거라고."


연애라는 말이 나는 너무나도 어른들의 언어인 것만 같아 어색하고 이상하게 들렸지만, 수민이가 연애라고 하면 연애가 맞을 것이었다.


"니하고 윤석이가 하는 것도 연애가?"

"그럼. 장거리 연애. 근데 장거리 연애는 너무 슬프고 힘들어."


어쩜 수민이는 이렇게 잘 알까. 한 10살은 더 먹은 사람 같이 구는 수민이의 거침없는 대답에, 그녀의 똑 부러지는 상황 정리에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웃네, 우리 혜강."

"웃게 해 줘서 고맙다, 우리 혜민."

"우리 천조하고 유경이, 아니 혜리하고 유리도 불러서 다 같이 한 번 모이자."

"그래 여름 방학하면 날 잡아 함 뭉치자."

"윤석이가 이번 여름방학에도 들어올 거라 했거든. 윤석이 오면, 우리 다 같이 캠핑 가자. 물론 나만 간다고 하면 우리 엄마가 안 보내주겠지. 우리 이모하고 이모부 졸라서 같이 가달라고 하려고. 최강도 부르고, 상황 되면 네 동생 동우도 데려가고."

"좋다, 가자 캠핑!"


고3이 캠핑을 간다 하면 집에서 보내줄지 확신이 없었다. 모두가 허락을 받고 캠핑을 갈 수 있을까 너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막연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캠핑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자체가 너무 신나고 좋았다. 캠핑이라는 말이 설레는 것인지, 내 마음이 이미 설레서 무슨 말을 들어도 설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설렘이 맞았다. 오랜 겨울 추위로 꽁꽁 얼었던 내 마음이 차츰 풀리며, 봄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언어가 제대로 다 덮어 주지 못하는 마음의 사각지대에도 봄기운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스며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히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