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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조자 다니엘

[소설] 앵그리 힐러 화니

by 하트온

어느 날 화니는 깨달았다. 한때, 분노는 서러운 눈물의 형태로 왔었다는 것을. 그녀가 울고 또 울던 시간,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던 시간.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끝날 때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울다 지쳐 엎드려 있던 화니에게, 언니들은 싸늘한 얼굴로 번갈아 가며 말했다.


"이제 네가 고집부리고 떼쓴다고, 널 챙길 사람 없어."

"앞으론 어디서라도 그렇게 아기 짓 하지 마. 이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야."


그들의 말에 심상치 않은 위협과 불안의 가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게 느껴져, 화니는 몸을 비틀어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물었다.


"왜 마지막 충고야?"

"이제 너는 우리와 같이 살지 않을 거니까."

"왜?"

"넌 우리 동생이 아니야. 넌 우리에게 남이라고."

"거짓말이지?"

"네 엄마가 우리 아빠와 잠시 같이 살았었는데, 너만 맡겨두고, 어느 날 도망갔어. 넌 기억할 수 없겠지만."


화니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엄마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이 솟구치는 느낌에 우앙 울어버리려다가, 아기 짓 하지 말라던 큰 언니의 말이 생각나 울음을 꿀꺽 목젖이 따갑도록 눌러 삼키며, 언니들에게 다가섰다.


"나 말 잘 들으라고 겁주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내가 언니들 말 진짜 잘 듣고, 울지도 않을게. 언니들이 싫어하는 거 절대 안 할게."


화니는 어린 마음에도, 자신이 살려고 비굴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이 차가 큰 언니들과는 친하게 지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절박하도록 진심이었다. 버림받을 것 같은 마음이 들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뭐든 하겠다고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언니들은, 차디찬 바위 덩어리처럼 냉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둘이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똑똑하게 처신한 것이었다. 관계를 깨끗하게 끊는 편이 나았다. 친동생도 아닌 아이, 정이 가지도 않는 어린아이를 맡는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빠가 남긴 집과 재산을 처분해봤자, 자신들 둘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것을 이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빠가 화니를 딸처럼 아니 딸 이상으로 정을 주고 사랑하며 키운 것이 처음부터 싫었고, 돌봐야 할 입, 재산을 나눌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 두는 것은 좋은 결정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차피 일하면서 공부하려면, 앞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설픈 망설임 같은 것은 애초에 싹둑 끊어내고, 보육원에 맡기는 쪽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그들이 잘한 것이라고 화니는 인정했다. 그렇게 괘씸한 울분을 쌓아주었기 때문에 화니는 분노의 힘으로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함께 살았던 식구를 내치기가 어린 처녀들의 입장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을 굳게 먹었던 덕분에, 화니는 8살부터 춘천 산골짜기에 소재한 청솔 보육원에서 살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 와서 처음 맞닥뜨린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익숙한 존재들과의 인연이 산산이 부서지고 낯선 곳에 버려졌으니 날카롭고 서늘한 감정이 칼날을 들이미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모두 하나 같이 엄숙하고 말간 얼굴에 비슷비슷하게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 어른들만 있었다. 그들은 수녀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화니는 뜻도 모르면서, 다른 아이들을 따라 수녀님이라고 불렀다.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라는 것을 볼 때는, 검은 옷을 목까지 채워 입은 신부님이라 부르는 남자 어른도 만날 수 있었다. 화니는 왜 신랑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궁금했지만, 모든 궁금증을 속으로 삼켰다. 언니들이 질문하는 것을 귀찮아하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궁금해하고 물어보는 것도 '아기 짓'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화니는 가끔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가 그녀에게 했던 말,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곱씹곤 했다. 아빠가 맛있는 것을 사주던 기억, 책을 읽어 주던 기억, 아빠 등에 업혀 시장을 돌아다니던 기억,... 다 거짓 이래도, 아빠가 자신을 친딸처럼 사랑했다는 거 하나만큼은 진심이었을 거라고 붙들고 싶었다.


하지만 화니가 아빠의 사랑을 붙들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고, 눈앞으로 다가온 세상은 너무 생생하게 밀려들어와 그녀의 내면을 다 차지해 버렸다. 아빠 사진 한 장 얻지 못했던 화니에게 아빠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언니들의 얼굴도 점점 사라져 나중엔 아기 짓 하지 말라는 목소리만 남아 맴돌다, 그마저도 나중엔 환청이었나 생각될 만큼 모든 것이 희미하게 흩어져 갔다.


보육원엔 끊임없이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처음에 화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아이들이 들어왔다가 정들만하면 떠나는지. 하지만 금방 그곳의 생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곳이 아이들의 유기견 보호소 같은 곳이란 걸 말이다. 자원봉사를 명목으로 나온 귀부인들이 강아지 고르듯, 아이들을 눈여겨보다가 데려가기도 했고, 외국으로 입양을 떠나가기도 했다. 아이가 어리고, 심신이 건강하고, 가능한 외모가 예쁘고, 남자아이보다는 여자 아이일수록 선호된다는 것도 점차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 이치였다.


8살이 넘은 화니는, 사실 입양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영리한 화니는 보육원 수녀님들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직감이 처음부터 들었고, 전전긍긍 이렇게 저렇게 눈치를 살피며 애를 써 보던 중, 보육원의 어린 꼬마들을 돌봐주고 도와줄 때, 수녀님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책을 읽어주고, 함께 손잡고 산책하고, 때론 업어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거나, 화장실에 갈 때 따라 가 주고, 아이들의 몸이 만들어 내는 지저분한 것들을 닦아주고 씻어 주고,... 아빠가 화니에게 해 주었던 것들을 그대로 꼬마들에게 해 주면 되는 것이어서, 화니에게 가장 쉽고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화니가 돌봐준 아이 중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아이는 다니엘이라는 남자아이였다. 화니가 처음 보육원에 왔을 때, 세 살 꼬마였던 그 아이도 화니가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떠날 때까지 어떤 어른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다. 심장병이라는 불량품 낙인이 찍힌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한참 통통한 얼굴로 장난치고 짓궂을 나이에도 다니엘의 창백한 얼굴 퀭한 두 눈은 병색이 짙었다. 그렇다고 보기 싫다거나 못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두르는 일 없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어느 나라의 우아한 어린 왕자처럼, 어린 나이에 모든 세상사를 다 알아버리고 일찍 지쳐버린 기묘하게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운동도 할 수 없고, 자주 병원에 실려갈 일이 생기니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는 다니엘이었지만, 남다른 손재주가 하나 있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그리고 만들어 내는 일에 놀랄만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의 재능을 가장 잘 알아보고, 그 재능에 가장 열광한 사람은 화니였다.


화니에겐 다니엘의 재능이 너무나 특별한 것이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이 결핍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보육원이라는 환경에서, 가질 수는 없지만, 만들 수가 있고, 허락된 것은 없지만 창조해 낼 재주가 있는 다니엘에게서 화니는 큰 기쁨과 안정감을 얻었던 것이다. 화니가 곁에서 환호하고 기뻐하는 것, 그녀의 사랑과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에게도 다음날 눈을 뜨고 또 뜰 수 있는 큰 힘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생명의 힘을 불어넣는 존재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소년이었다. 화니 누나가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어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화니 누나의 신랑이 되면 좋겠다는 꿈도 어렴풋이 꾼 적이 있었다.


화니가 가장 처음 갖고 싶어 했던 것, 다시 말해 다니엘에게 가장 처음 요구했던 것은, 기부 저금통이었다.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저금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화니는 원장 수녀님에게 부탁해 못쓰는 서랍장을 얻어다 다니엘에게 갖다 주었다. 다니엘에겐 이미 어릴 때부터 하나하나 모은 공구들이 있었다. 진짜 가게에서 산 공구가 아니라, 그런 공구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길에서 주운 쇳조각들을 구부리고 연결하고 깎아서 직접 만든 원시인의 도구 같은 그런 것들이었다. 누가 얼핏 보면, 고물 조각들을 모아 가지고 노는구나 생각하겠지만, 좀 더 자세히 오래 보면, 기본적인 기능은 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장비가 후진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뿐,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다니엘은 서랍장을 뜯어, 깎고 다듬고, 그림을 그리고 말리고, 오랜 과정을 거친 후, 멋진 저금통을 만들어 냈다. 그제야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화니는 그 저금통을 보육원 입구에 설치해 달라고 했다. 화니는 그 저금통 앞에 이렇게 써서 붙였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마음의 부모님이십니다. 당신의 작은 기부가 우리의 재능을 키워 줍니다. 좋은 사회인으로 성장해, 감사함을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화니는 사람을 설득하는 말을 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화니와 다니엘의 능력이 연합하여, 지갑을 열고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저금통을 완성하였다. 짠한 마음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저금통을 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감히 훔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저금통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저금통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화니는 다니엘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공구를 하나씩 선물하기 시작했다. 왕자님의 창백한 얼굴에 낯설도록 환한 기쁨이 번졌다. 다니엘은 제 침대 밑바닥의 마루를 열어, 누가가 가져오는 공구를 자신이 아끼는 다른 쇳조각들과 함께 기술 좋게 숨겼다. 저금통을 만들 때 화니가 내 건 조건은 세 가지였다. '모두가 반할 만큼 아름답게. 그리고 아무도 쉽게 뜯거나 열 수 없게, 하지만 화니는 쉽게 열 수 있게.'


수녀님들은, 가끔, 저금통을 들고 흔들어 보았지만, 저금통을 뜯을 만큼 돈이 모여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익명 기부는 잘하지 않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저금통이 보육원 입구에 놓여 있는 것이 참 적절하기도 하고, 예쁜 조각 작품 같기도 해서, 이젠 그곳에 그 저금통이 없는 그림을 생각할 수 없는 눈과 마음의 습관이 되었다.


남은 보육원 생활 동안, 화니와 다니엘은 꼭 갖고 싶은 건 갖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을 뿐 아니라, 화니가 보육원을 나갈 때, 정부에서 나온 지원금의 열 배쯤 되는 돈을 모아서 나갈 수 있었다. 보육원 생활 동안 화니는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마음을 움직이면 사람들의 지갑이 활짝 열린다는 것을 화니는 알차게 배웠다. 화니가 보육원을 떠나기 전날, 그녀는 다니엘에게 마지막 선물을 했다. 작은 폴더 폰이었다.


"이 전화기로 문자도 할 수 있어. 누나 직장 구해서 첫 월급 받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바꿔 줄게."


한 몸처럼 지냈던 화니의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할지 절망감이 밀려와 마음이 무너져가는 느낌에 조금 나아가던 심장병이 다시 도질 것만 같다고 느끼던 다니엘에게 화니가 건넨 전화기는 한줄기 구원의 빛 같았다. 누나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 내색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던 마음이, 다니엘의 두 눈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다니엘, 울지 마. 넌 내 동생이야. 누나가 평생 지킬 거야. 누나가 집 마련하면 너부터 데려가 미술 공부도 제대로 시킬 거야."


이런 말을 다니엘에게 하면서, 화니는 제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을 다니엘에게 하는 순간, 마음속의 무언가 끓어오르던 것이 잠시 후련하게 식어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시원함은 화니의 마음속에 들끓는 열기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순간적으로 일어난 현상일 뿐이었다. 지금부터 제 속의 불덩이를 잠재울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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