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감정과 예술: 소설 작가 에드거 엘렌 포와 화가 헨리 푸젤리
에드거 엘런 포 (1809-1849)
내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을 제대로 읽어보기도 전에 - 사실 오랫동안 기억한 것이라곤 '검은 고양이' 밖에 없었다 - 포 작가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가 우리 동네에 살았었고, 그의 무덤도 여기 이 도시 안에 있다는 사실이 친근감을 느끼는 데 한몫을 했겠지만,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에 대해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이 모종의 연민은, <애너벨 리> - 포가 그의 어린 아내를 잃고 썼던 - 라는 한 편의 서정시에서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달빛이 비칠 때면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게 되고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별빛이 떠오를 때 나는(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동자를 느낀다(Of the beautiful Annabel Lee;)
하여, 나는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내 생명 내 신부 곁에 눕노니 (Of my darling-my darling-my life and my bride,)
거기 바닷가 무덤 안에 (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물결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곁에 (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 <애너벨 리> 시의 마지막 연 -
포는 몹시도 불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유랑극단 배우인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났고, 그 이듬해는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존 앨런이라는 양부의 손에 자라며 교육 기회도 얻었지만, 포는 점점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앨런은 더 이상 포를 지원하지 않게 된다. 포는 글을 쓰며 생계를 이어가려 했지만, 당시의 미국의 출판계 상황과 경제 상황이 맞물려, 포가 아무리 뛰어난 글을 써도 그는 제대로 대가를 받기가 힘들어, 몹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거기다 음주와 도박의 습관까지 있어 그의 삶은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친가 식구였고, 사랑하던 아내였던 버지니아는 폐결핵으로 어린 나이에 죽어 버린 것이다. 너무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 약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24세에 요절한 버지니아가 포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로부터 2년 후 포는 볼티모어 길거리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병원으로 후송되자마자 죽음을 맞이 하였는데, 자살, 집단 폭행으로 인한 타살, 알코올 중독사, 수막염, 심장병, 간질, 매독,...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몹시도 많은 설이 있다. <애너벨 리> 시의 마지막 연 '내 생명 내 신부 곁에 눕노니...'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미 포가 아내를 보내며 스스로를 아내와 함께 죽음 속에 눕혔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에서 포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셔가의 몰락 (1839)>
나는 포의 소설들을 찬찬히 읽어 보고 싶다는 몇 년 묵은 마음을 마침내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의 작품을 마음을 열고 읽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어셔가의 몰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가 30세, 그의 문학 전성기에 쓴 작품이다. 시작부터 볼쾌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표현의 향연이 펼쳐진다:
“During the whole of a dull, dark, and soundless day in the autumn of the year, when the clouds hung oppressively low in the heavens, I had been passing alone, on horseback, through a singularly dreary tract of country, and at length found myself, as the shades of the evening drew on, within view of the melancholy House of Usher, I know not how it was - but, with the first glimpse of the building, a sense of insufferable gloom pervaded my spirit. I say insufferable; for the feeling was unrelieved by any of that half-pleasurable, because poetic, sentiment, with which the mind usually receives even the sternest natural images of the desolate or terrible.” (억누를 기세로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어둑하고 적막한 어느 가을, 나는 홀로 말을 타고 지겹도록 황량한 시골 지방을 지나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자욱해질 무렵, 음울한 느낌의 어셔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처음 그 저택을 보았을 때부터, 참을 수 없는 강도의 우울함이 내 영혼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었다. 참을 수 없는 그 느낌은, 아무리 황량하고 볼품없는 자연경관이라 하더라도 조금쯤은 시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도무지 조금도 그런 편안한 느낌이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지 않는 탓이었다.)
인간의 공포라는 감정을 이루는 요소들, 건물 환경과 사람의 성향이 오랜 시간 주고받아 온 영향을 낱낱이 파헤치는 느낌의 소설이었다. 작가 자신이 느끼는 공포감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언어의 성을 하나하나 쌓은 작가의 필력에, 인물의 몸짓과 안색, 목소리 묘사를 통한 간접적인 심리와 정신상태 묘사 디테일에 나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주인공 화자를 초대한 집주인 친구 어셔라는 인물은, 몇 백 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낡고 암울한 기운의 대저택에 살며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죽어가고 있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장래에 일어날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일세… 나는 위험 그 자체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공포’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영향이 두렵다네......."
어셔는 단 하나의 혈육인 쌍둥이 누이동생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그 죽음이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며, 어떤 희망도 없이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내 곁에 있는 딱 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그는 누이동생이 죽었는데, 집에 한 동안 누이의 시신을 보관할 것이라며 주인공 화자인 친구에게 알린다.
음울하고 추워서 더는 못 읽겠다는 느낌이 밀려올 때쯤, 아!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셔는 여동생을 산채로 관에 넣어 지하 창고에 넣어 놓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동생이 온 힘 다해 관을 밀치고 나와 흰 드레스에 피를 줄줄 흘리며 오빠 방으로 와서 어셔를 껴안으며 쓰러지는 걸 보고, 어셔의 친구, 화자는 기겁해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오고, 도망가다 돌아보는 그의 눈앞에서 몇 백 년 역사를 가진 어셔 집안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어셔가의 몰락>에 등장하는 화가 헨리 푸젤리
<어셔가의 몰락>은 어셔가 하는 모든 행동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는 방식으로 그의 심리상태를 손에 잡힐 듯 그려가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소설이다. 어셔의 친구인 화자는 어셔의 우울한 마음을 돕기 위해, 함께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어셔의 광기 어린 음악 연주를 들어주기도 한다. 화자는 특히 어셔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몸이 떨릴 정도로 공포감을 느끼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우울병 환자가 화폭 위에 펼쳐 놓은 순수 추상화들 앞에서 격렬하고 참기 어려운 공포를 느꼈다. 스위스 화가 푸젤리 (Henry Fuseli, 1741-1825)의 불타는 듯하면서도 구체적인 환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에도 이런 공포와 의구심을 느껴 본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푸젤리가 포에게 어셔의 그림에 대해 영감을 준 화가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찾아보기 시작했다. 헨리 푸젤리는 1741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대부분 영국에서 화가 생활을 하였으며, 1825년에 타계한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문득, 1749년생인 독일 괴테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테가 문학가 사상가로 독일 정신을 확립하고 있는 동안, 푸젤리는 영국에서 <악몽(The Nightmare)>이라는 제목의 그의 그림 한 편으로, 사회에 엄청난 충격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 푸젤리는 원래 목사가 될 생각이었고, 성직 임명까지 받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화가의 꿈을 붙잡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1765년)였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1770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1778년까지 미술 공부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를 접하고 그의 그림체에 심취하게 되는 바람에 푸젤리는 평생 그 스타일을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영국에 돌아와 그림을 처음 발표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몽>이었다. 이 그림은 푸젤리를 무명 안수 목사에서, 영국 미술계가 주목하는 뛰어난 화가로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했다. 어두컴컴한 침실, 축 늘어져 잠자는 여성의 몸, 그 위에 흉측한 모습의 고블린 - 잠자는 여자를 덮친다는 악령-이 앉아 있고, 침대 뒤로 보이는 검은 말 두상도 심상치 않은 공포감을 더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악몽의 공포감을 그대로 느끼게 만드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감정을 내뿜는 그의 충격적인 그림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국 미술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충격 파장을 일으켰다. 이 그림에 대한 연쇄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여러 버전의 아류 작품들이 여러 경로로 파생되었으며, 풍자 그림 정치 패러디에 사용되기도 하는 등, 푸젤리가 쏘아 올린 공은 하나의 커다란 문화 현상이 되어 갔다.
이 현상에 문예사조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푸젤리가 시작한 일은 바로 '고딕 호러 미술' 장르의 개척이었다. 여기서 고딕이라는 말은 주로 오래된 건물, 고딕 건축 양식이 등장하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다. 호러물이라는 장르가 이때부터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헨리 푸젤리가 선도한 호러 열풍은 미술을 넘어 다른 여러 분야를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고딕 호러가 문학으로 이어지면서,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선 수많은 고딕 문학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 - 특히 <검은 고양이>가 푸젤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어셔가의 몰락>에서도 푸젤리가 언급된다 -부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부터 근세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창작물 - 모든 종류의 호러물, 호러 로맨스물까지 모두 푸젤리가 준 영감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러와 낭만주의
이러한 작품들의 문학사조적 의미는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쾌락의 연장선상으로서 - 이후 퇴폐주의(데카당스)까지 이어질-, 공포 쾌감을 즐기는 의미다. 호러라는 장르와 낭만주의적 쾌락 추구가 이어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트와일라잇> 같은 뱀파이어 로맨스가 선정적인 언어의 요란 없이 어쩌면 그렇게 최고의 로맨스를 탄생시켰을까 싶었는데, 비결은 바로 위험한 남자의 최고봉인 뱀파이어 연인이 주는 공포라는 쾌락이 낭만을 최고조로 부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왜 에드거 앨런 포 앞에는 '낭만주의 사조의 중심인물', '낭만주의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창조한 공포감은, 쾌락을 추구하는 낭만주의 문학의 범주 안에 당당히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힘든 삶 속에서 꽃 피워낸 단편 소설들은 오늘날의 탐정 추리 소설, 범죄 소설, 공포 소설의 아버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모든 과학 탐정 수사 추리물들이 모두 에드거 앨런 포가 준 영감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푸젤리의 영향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유명한 심리학 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방에 램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그림과, 푸젤리의 악몽 이미테이션 그림을 걸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칼 구스타프 융 또한 그의 저서 <인간과 상징, 1964>에서 푸젤리의 <악몽>을 포함한 여러 그림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악몽의 의미, 악몽 속에 도사린 인간 본성 밑바닥 욕구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푸젤리의 그림은 꼭 필요한 자료였을 것이다.
헨리 푸젤리와 애드거 엘런 포 그리고 내 차례
두 사람의 일으키고 지나간 폭풍의 흔적 앞에서 나는 잠시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앉아 있다. 충격적이지만, 충격받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싶어서, 지나간 자리를 유심히 관찰하려 한다.
푸젤리가 그림을 통해 드러낸 내면 깊숙한 곳의 감정.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바로 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언어로 풀어내야 할지 바로 알아차린 포. 그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나. 요동치는 내 안의 감정. 이젠 나의 차례일 것이다. 나에게 이들이 남기고 간 유산을 열어보고, 알아채고, 내 이야기를 용기 있게 풀어낼 차례. 나에게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는 시간이 왔다. 내 안의 공포를 들을 시간이. 깊숙하게 숨어 있던 그 미친 공포를 꺼내어 신명나는 이야기로 써내려 갈 시간이. 드디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