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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Dec 11. 2022

혹독한 변화의 계절을 지나며

2022년 12월 10일

가을도 아니고 뚜렷한 겨울도 아닌 이때. 차츰 생명이 빠져나가는 자리에 죽음의 희뿌연 빛이 성에처럼 들러붙어 빛바랜 추억으로 퇴색하는 하루하루가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이 시점. 곧 블랙홀로 미끄러져 버릴 것 같은 불안정한 시간을 안간힘으로 견디는 느낌이 인생의 어느 시기를 닮은 듯 낯설면서 익숙한 시간. 청년도 노년도 아닌 젊음과 늙음이 공존하여 뒤죽박죽 예상치 못한 이상한 일들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구간. 나는 잠깐의 여유를 얻고자 걸음을 멈춰본다. 세찬 파도를 맞은 온갖 격동들을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잠시 스치는 햇볕에 살짝 마음이 느슨하게 가라앉는 이 타이밍에 나는 흰 화면을 펼치고 내 안의 글을 급히 쏟아 본다.  


요즘은 글을 쓰고 갈무리하는 일이 쉽지 않다. 기온이 떨어지고 날이 싸늘해지면서, 남에게 개인적인 감정과 사연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본성이 있는 대로 움츠러들어 온 힘으로 내면을 보이는 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다. 글을 잘 이어가지 못하다 보니, 글을 완성까지 끌고 가기가 어려워, 찔끔거린 글들을 자꾸 서랍 속에 방치하게만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열어보면, 그날 그 글을 시작했던 감정이 어느새 자취 없이 달아나 버리고, 나는 방향을 잃고 갈 곳 없는 글들을 깨끗이 소각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순간의 여유를 주는 잠깐의 느슨함이 저절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지난 일주일, 해야 할 일들을 틀어막고 억지로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2022년은 코로나 팬데믹의 폐쇄회로가 드디어 뚫린 것처럼, 세상이 2020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의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만큼 나 개인과 내 가족의 일상에도 큰 변화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봄기운이 동하니 모든 것이 기지개를 펴고 피어나야 하는 상황인 것인지 모른다. 나는 현재 내 이 옹고집스런 내면으로 그 변화들을 다 감당하는 것이 조금 버거운 상황이다. 그래서 잠시 멈추어 생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계속 이렇게 멈춰 있을 순 없다. 곧, 빠른 시일 내에 여러 마음의 물살들이 세차게 터져나가는 속도와 방향이 결정짓는 대로 이런저런 결정들을 하고 일처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나는 모든 것을 일부러 손 놓고 있었다. 중요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고 나는 그것에 감정의 물살이 조금이라도 밀려들지 않는, 차분한 이성의 강바닥을 드러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말한다. 꼭 일어나야만 하는 변화는 이유가 있다고. 그 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햄 앤 허 보다는 스커리 앤 스니프가 되어 빨리 변화에 적응하라고. 운동화를 동여 매 신고, 기존의 치즈 창고를 박차고 뛰어나가라고.


따뜻하고 안온하고 편리한 것을 원하는 나의 뱃속이 말한다. 이 나이에 나는 변화가 싫다고. 변화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어떤 앓이도 이젠 하고 싶지가 않다고. 편하게 안주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똬리를 틀고 아랫배 한가득 들어차 있는 나의 속사정을 선명히 본다. 


나는 봄이 태동하는 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다. 내 일상의 변화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도 모종의 변화를 감당해야 한다. 얼마나 내 주변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생각하고 도울 것인가, 얼마나 나 자신을 도울 것인가. 아마도 주변과 협력하고 관계를 돈독히 지속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자 상대를 위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항상 내 안으로 잦아들고 싶은 고립을 향한 충동이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저 멀리로 숨어들고 싶은 성향이 내 안에 소용돌이친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기보다 혼자만의 알 속으로 들어가 깨기 힘든 단단한 껍질로 나를 둘러싸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다. 어린아이가 아니므로 나는 그럴 수 없다. 책임이 있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른다운 결정을 해야 한다. 나를 진정으로 위하고 모두를 배려하고 고려하는 현명한 결정을 잘해야 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형성된 조건반사 반응 같은 감정의 습관 때문에, 때때로 나는 내 능력을 잊는다. 약간의 아픔, 약간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당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내 안의 포용력을 말이다. 어떤 것들은 나 스스로에게 매일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나는 꽤 너르고 크고 강한 존재라고 수시로 알려주어야 한다. 더 이상은 도망가서 어느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새끼 강아지가 아니라, 집을 지키는 능력이 있는 눈빛 형형한 늠름한 대형견이 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준비가 되었으므로, 이 변화가 더 이상 혹독하지 않을 예정이다. 왜냐면, 내가 지금 막 그렇게 쉽게 감당할 변화가 되리라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래전 자동차라는 기계에 손도 대기 싫었던 내가, 산골 사는 고모도 따고 바닷가 사는 이모도 따는 운전면허를 나도 따 버리기로, 운전 전문가가 되어버리기로 결심했던 날처럼, 누구나 인생길에 감내하고 마는 변화를 나도 부딪혀 이겨내리라고 마음먹는다. 

   


대문 이미지: Pixabay (by pixel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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