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예뻐 보이는 각도

[에세이] 미니멀리스트의 사생활

by 하트온

내 눈이 좀 높지


옷 고르기가 진짜 너무 맹렬하게 어렵다. 내 오늘은 필히 얼마 짜리 옷이건 마음에 쏙 들면 장만하리라 돈과 의지를 지갑 두둑이 채우고 집을 나서도 옷을 못 산다. 덕분에 내 옷장만큼은, 미니멀리즘 다큐멘터리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출하다. 겨우 찾은 마음에 드는 몇 벌의 옷을 부지런히 돌려 입으며 단벌 신사처럼 계절을 난다.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옷 찾기가 힘들까. 처음엔 미국탓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미국 옷 시장이 망하고 있거나, 미국 디자이너 재봉사가 한국인 손재주를 못 따라가거나, 요즘 미국 패션 트렌드가 나하고 안 맞거나, 암튼 미국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들 옷을 고르러, 내가 20대에 즐겨 가던 한 매장 - 아직도 10대 20대 에게 인기가 많은 옷가게 - 을 돌면서 깨달았다. 그 어떤 원인보다 내 기준이 높아진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걸! 예전에 이 매장을 돌아다닐 때의 설렘이나 호기심 같은 건 깨끗이 빠져나가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비판적 사고능력이 내 심장을 압도하고 있다. 정말 누가 공짜로 줘도 받지 않겠다 싶은 물건만 한가득 쌓여있을 뿐인 곳에서, 한때 내가 옷을 즐겨 사 입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옷의 단점들만 쏙쏙 들어오는 내 눈, 내 시력을 좌우하는 기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20대의 나는 적당히 가격이 좋고, 요즘 트렌드에 맞고, 입어서 더 돋보인다는 느낌이 들면 별 망설임 없이 옷을 골랐다. 돈이 없어서 문제였지, 살 옷이 없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따진다. 옷감, 세탁방법, 바느질 상태, 군살을 가려주면서 몸의 장점은 드러내며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옷 선, 디자인,... 가격이나 트렌드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걸리는 기준이 너무너무 많고 복잡하다.


웬만한 옷을 입어 더 돋보이기가 힘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를 먹고 젊음이 가진 멋을 잃어가는 만큼 점점 더 옷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되었고, 옷에 바라는 기대치만큼 기준이 훌쩍 커져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이 머리 꼭대기에 가서 붙어 버렸다.



사람을 보는 눈


옷 고르는 기준이 턱없이 높아져 버렸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관계에 기대하는 내 기준도 너무 높은 게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전에 MBTI 검사를 했을 때, 관계에 관해 적혀있던 말들이 생각났다. INFJ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이 없거나 사회성이 약하다기보다, 친구에 대한 기준이 높고 까다로워 아무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식의 말이 적혀 있었다. 뭔가 옷을 고르다가 깨달아 버린 내 안의 높은 기준과, 그 말이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맺고 실망하는 패턴. 매번 잘 알게 된 사람에게 느끼는 것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감정을 품고 저런 시선으로 나를 계산하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만정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감정으로 다가간 사람과의 관계도 늘 실망과 부정적인 평가로 끝난다.


확실히 내 기준은 높고, 그만큼 내 마음도 높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주변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 정도 우정에 그 정도 의리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관계에 있어서도 완벽주의의 덫에 걸려 있었는지 모른다. 나이 먹어가며 나의 부족함 결핍을 깨닫는 만큼, 옷에 바랐던 만큼이나 관계에서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사람에게 완벽한 우정과 의리를 기대했던 그만큼의 깊이와 넓이로 실망의 덫을 팠던 건지 모른다. 나는 절망에 가까운 이 깊은 실망의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니, 점점 사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꺼리게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나에게 풀어갈 도리 없는 미궁이 되었고, 친절과 예의로 무장하여 적이나 만들지 말고, 마주칠 때 밝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사이나 유지하자 싶었다.



예뻐 보이는 각도


관계 문제가 어려웠던 것은 감정이라는 결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만드는 진짜 원인을 보지 못했다. 감정을 지피는 연료가 내 안의 기준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눈이 가려진 채 모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판단을 하고, 아무래도 그 판단이 찝찝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꼴이었다.


기준이라는 장벽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바라던 깊은 정, 충성, 순수한 호감, 밝은 미소와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행동, 계산하지 않고 이용하지 않는 마음, 내 말을 잘 경청하고 이해하는 공감 능력... 이 모든 기준을 하나하나 떼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나도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바라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완벽주의 아집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꽁꽁 묶는다.


한 때는 그 기준이 너무나 소중했다. 어린 시절 관계가 힘들었던 게 다 사람 보는 안목과 기준이 없어 이상한 사람들을 마음에 들인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철저한 심사가 나에게 좋은 친구들을 데려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산이었다. 높은 기준은 높다란 벽을 만들고 사람을 쫓아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높고 두터운 벽은 분리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분명 어울릴 사람을 신중하게 살피고 골라야 하는 것은 맞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아무나 만났을 때 내 삶에 피해가 클 수 있다는 건 몸으로 경험했던 일이다. 서로에게 잘 맞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내 사람들이 분명 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높은 기준을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태도는 결코 아니다. 그런 태도는 모두와 연결을 끊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장점이란 땅바닥에 붙어 피는 야생화처럼 느껴진다. 벽을 세우고 높이 올라가면 보이지 않는 꽃이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자세히 보아야 거기에 예쁜 꽃, 감탄할 만한 생명력이 보인다. 그걸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멀리서 거대한 포장만 보고 다가갔다가 초라한 실물에 실망하여 쉽게 밟고 지나가게 될 뿐이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아름다움을 놓쳤으면서, 좋아하는 척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위선이고 가식이다. 예리한 인지능력을 가진 인간은 가식과 진심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좋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예의 바르고 예쁜 말로 포장하려 해도 내 안에 실망과 부정적인 견해를 상대가 결국 선명히 보게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태주 시인 시집 제목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원리를 영리하게 통찰한 시인의 표현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기준을 낮추고 몸을 구부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만의 예쁜 꽃을 발견해 줄 줄 알아야 한다. 몸을 구부릴 줄 아는 능력자가 먼저 구부려 줄 필요가 있다.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은 높이 올라가는 일도 멀리 가는 일도 아니다. 인간 본성을 거스리는 가장 힘든 일은 낮추고 구부려 땅에 붙은 상대의 장점을 바라봐 주는 일이다. 상대도 함께 몸을 구부려 내 장점을 봐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고 강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게 좋은 관계를 맺는 시작이기에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거듭 그리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받고 실망해도, 내가 먼저 몸을 낮추고 상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찾는 사람은 내 높은 기준을 만족하는 사람, 높은 벽 위에서도 확실히 보일만큼 무언가를 높이 쌓아 올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을 부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바닥에 붙은 나의 아름다움을 찾아 발견해 줄줄 아는 사람을 나는 원한다. 서로 그리해 줄 수 있는 관계가 내가 찾는 관계다. 나 또한 내가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내 안의 기준을 허물어 청소한다. 부지런히 내 바닥을 청소하고 깨끗이 정돈하며, 바닥까지 몸을 낮추어 서로의 귀한 아름다움을 찾은 관계 안에서, 진짜 호감과 감동과 감사로 가득한 관계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삶을 나는 기대한다. 비록 겨우 쌓은 기준을 버렸지만, 드디어 사람을 예쁘게 보는 각도를 찾아 나는 몹시 기쁘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Evge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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