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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May 11. 2023

폭우를 견디는 배

[일기] 2023년 5월 10일

날이 갈수록 저는 현재에 지금에 몰입을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를 앞당겨 걱정하는 일이 부질없다는 걸 잘 알게 된 연륜, 오래 묵은 과거는 점점 꺼내 머리 굴리기 힘든 뇌력, 흰머리 늘어가는 내리막길 미래는 찌질한 과거만큼이나 일단은 덮어두고 싶은 심리, 이 노화 삼총사가 합력하여 이런 긍정적이고 반가운 부작용을 만들어 줍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창이 지나간 게 서럽고 서글픈 중년 여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신이 내리는 위로의 오묘한 섭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길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몇 가지 단서들을 조합하여 패턴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어릴 때에 비해 더 발달하다 보니, 어떤 일들은 그것이 어디로 달려갈 예정인지, 노스트라다무스 머릿속처럼 청사진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 셀프 예언은 슬며시 한 구석에 밀쳐두고, 지금 내가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 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신경 포커스를 정확히 맞추는 순간, 에피듀럴이 제대로 다스린 산모의 산통처럼 훨씬 마음이 편하게 가라앉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했을까요. 지금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듯 느껴집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순식간에 몸도 괴로워지고 부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살아있는 의미 자체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하고 긍정적인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요? 불안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야, 내가 해야 할 몫을 해내며,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자신의 마음보다 더 챙겨야 할 더 높은 가치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일신의 안위'보다 가족을, 민족을, 국가를 위해, 혹은 위기에 처한 남을 위해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인과 열사와 의인들에 대한 위인전을 많이 읽으며 자랐고, 그 가치에 심히 매료되어 그것을 위해 나도 목숨을 걸겠다 마음먹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이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길이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개인을 뛰어넘는 높은 가치는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저는 더 이상은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동안 오래 덮어두고 이상적 가치를 따라오라고만 했던 강압적 자세를 바꾸어,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내 마음이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찬찬히 따져보는 일에 시간을 더 보내곤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그르다고 생각하는지, 왜 이런 것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편해지는지,... 그 모든 것 안에는 엄청난 배움과 경험의 역사가 있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끼친 영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실타래 그대로가 하나의 가치 있는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어디로 향하건, 그것은 하나의 가치 있는 의견이다라고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내 의견을 믿어주고 들어주기로 정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편안해진 것 같아도, 삶은 계속 흘러가고, 결과를 불러오는 어떤 원인들은 계속 생겨나고, 나의 내면세계에도 외부세계와 마찬가지로 끝없는 원인 결과 게임이 펼쳐집니다. 내 마음을 스스로 잘 돌보고 다스리고 있다고 자신하다가도, 어느 날엔 자꾸 마음에 바람과 폭우가 들이치는 이상 기후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때론, 언제까지 이렇게 삶이 변덕스러운 바람 같을 건지, 길을 잃은 느낌, 목적지에 도달하기나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삶은 계속 이럴 테지요. 이렇게 요동치는 삶의 파도를 타고 버티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현명하게 잘 사는 사람의 기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 지치고 실망되고 마음이 언짢고 몹시 불편해지다가도, 그 감정을 계속 붙들고 헤쳐갈 힘과 기억력이 없어, 풍랑에 배를 구하고자 뱃짐을 던져버리는 뱃사람처럼, 망망대해 같은 인생의 바닷속에 불편한 감정들을 던져버리고 계속 나아가는 내 모습을 봅니다. 나에게도 조금은 삶을 항해하는 뱃사람의 내공이 쌓여있구나, 희망의 빛이 조금 새어 들어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의 집념과 결단,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항하여 벌이는 사투가 문득 떠오릅니다. 내 마음을 비춰보고 들여다보게 해 주는 스토리 한 편의 힘입니다. 내 삶도 내 글도 누군가에게 그런 힘나는 스토리가 되어주기 위해 끈질진 집념의 힘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글이 저에겐 바다 사투를 벌일 수 있게 해 주는 배 한 척입니다. 글이라는 배를 타고 길을 찾아냅니다. 그러니, 글쓰기를 그만두어선 결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결론에 오늘도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내가 꼭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줍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dimitrisvetsikas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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