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습작] 나는 결혼 안 합니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장순은 상대에게 용기를 주고 성공으로 이끄는 재능이 있는 여자였다. 이 한남동 바닥에 널린 아름다운 외모나 대단한 학벌,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는 친정 가족 같은 건 없었지만, 그녀가 뒤로는 남산을 두고 앞으로 한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이 금싸라기 땅 위에 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바다처럼 너른 내면에서 흘러나와 상대방을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그 마음의 힘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순의 남편이 당당히 알짜배기 기업 총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아내의 공이 크다 할 수 있었다. 남편이 무엇을 해도 잘 될 거라 바로 믿어버리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여자가 곁에서 끝없이 주는 힘을 받으며 그는 신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장순은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설 용기를 다 나누어 준 후 스스로를 위한 용기는 조금도 남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늘 남편 그늘에 숨어 뒷바라지하며,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세월이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절벽 아래 텅 빈 공간을 내려다보는 가파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비슷한 연배와 형편에 처한 편안한 사모님들은 여유롭게 인문 지식을 자랑하는 북클럽을 열고, 미술관으로 극장으로 수준 높은 예술작품과 공연을 보러 다니고, 선진국을 만든 문화유산이 살아있다는 유럽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는데, 아무 아는 것도 없고 영어도 한 마디 세련되게 하지 못하는 장순은 자신의 낭떠러지 절벽 같은 빈약한 지식이 드러날까 봐 그들과 어울려 다닐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누굴 만나도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사랑받을 만한 여자였지만,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날까 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점점 크게 자라나 버려, 이젠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고 뒷방 늙은이 고립감에 시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주변 사람들 모두 처음엔 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용기를 가지고 하나하나 도전하고 배우면서 성장해 간 것이었다는 걸 그 누구보다 그들을 인내하며 끝없이 응원했던 그녀가 잘 알았다. 보잘것없는 시작이어도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열매를 맺는 날이 온다는 것 또한 산 증인으로서 누구보다 확신하는 일이었다.
장순은 자신에게도 용기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입이 무거운 가정교사를 찾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입이 무거운 가사 도우미도 찾는데, 입이 무거운 선생은 못 찾을 이유가 뭐가 있겠냐는 생각을 마침내 해냈다.
그렇게 장순이 이나무 선생을 찾게 된 것이었다. 장순이 어느 날 같은 콤플렉스를 가진 남동생 - 남편 회사의 하청을 받는 계열사 사장인 - 에게 속내를 드러냈고, 동생이 실은 자신도 몰래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며, 자신의 친구 딸이자, 비밀과외 선생이라는 아가씨를 소개했다.
장순은 나무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동생에게 사연을 듣고 보니, 나무는 참으로 딱하고 불쌍한 아가씨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의 죽음이 깃든 슬픈 가정사를 가진 가정교사는, 한참 딸 뻘 어린 나이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차츰 깃들기 시작하는 초로 여성의 고뇌를 알아줄 것만 같았다. 배움에 대한 자신의 깊은 결핍감과 수치심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녀린 어깨를 흔들며 재잘재잘 곧잘 떠들면서도, 결코 제 고객에 관한 것은 한 조각도 흘리지 않고 비밀로 봉인해 주는 야무진 선생이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 이 아가씨가 제격이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