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그가 주는 정반대의 신호들은 나를 헷깔리게 했다. 연애에 있어서 한번도 상대의 감정에 확신이 없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이전까지의 모든 연애를 고백을 받아서 했고, 전 남자친구들의 나에 대한 마음 자체가 헷깔린 적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행동해야지."하며 남자친구들의 행동을 다그친 적은 있어도, 그들로 부터 헷깔리는 신호 자체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번에도 연애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였다. 물론 시작이 달랐다. 그는 "네가 좋아. 너와 사귀고 싶어."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고 말했다. 그것을 내가 "네가 좋아. 너와 사귀고 싶어."로 번역해서 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그럼에도 그는 어느 날 이야기했다. "나는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좋아했어." 더불어서 말했다. "나는 우리가 한국으로 치면 100일을 바라보는 커플에 있다고 생각해." 그의 이 이야기는 내가 그를 신뢰하기로 결정하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너무나 쉽게 믿었다. 그의 말의 의미를 더 크게 확인헤 보지 않았다. 그렇다. 결국 나는 그와 연애를 하고 싶었고, 우리 둘의 그러한 연인으로서의, 파트너로서의 큰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실수였을까? 적어도 나는 그가 계속해서 거리를 가늠하며 왔다갔다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멀리 있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까지가 맞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 느낌을 신뢰하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나는 어느 날 지쳐서 이틀 정도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힘든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도중에 연락을 다시 했다.
어느 날은 그가 나를 향해서 스페인어로 '여사친'이라는 단어를 썼다. 농담처럼 스페인어를 쓴 그였지만, '여사친'이라는 단어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결국 그 통화는 내가 그에게 사과하며 끝났다. 이상한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화술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의 정당함에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여사친'이라는 단어를 굳이 써서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에 대한 내 마음에 대한 이해나 사과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언제나 과민 반응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사과하는 입장이 되어야 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느끼든 상처를 받던, 불안함을 느끼던, 충격을 받던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표현을 서슴없이 했고, 그 직격타를 맞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결코 하지 않는 말들, 그를 향한 비난을 그는 나를 향해서 너무나 쉽고 서슴없이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듣는 충격은 더욱 컸다. 친구 관계였을 때 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평가와 비난은 그의 나에 대한 태도의 디폴트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잣대에 우왕좌왕하면서 맞추기 바빴다. 그 안에서 내가 그를 향해 무언가를 바라거나 내 의사를 표현할 공간 조차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요구에 맞춰서 움직이기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다.
3주간 통화를 하면서 나는 여러번 그에게 물었다. 나는 충분히 친구로서도 너희 집에 놀러갈 수 있다. 태도만 확실히 해주면 좋겠다. 너는 내가 그곳에 네 연인으로서 가기를 바라나. 그것을 계속 물었다. 그러나 그는 섹스에 매몰되어있었는지 계속 섹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섹스는 연인 관계에서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그가 내가 연인으로서 그곳에 가기를 원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확실하게 나는 네가 내 여자친구로서 거기에 가길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나를 안고 만지고 싶어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그 당시에 너무도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어긋나고 있었는데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 서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듣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기뻐할 것 같았던 소식을 말하는 순간 조차 우리의 논쟁에 묻혔다. 나는 이때 비행기 표를 취소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서로간의 진지한 관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이미 그가 관계가 아닌 섹스를 언급한 순간 그것이 내 안에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섹스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내 안에서는 이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가 정립되지 않는 상대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욱이 그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게 그가 너무나 소중했다. 내 안에서 관계에 대한 정립 없이 섹스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은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고, 내 안에서 그를 쓰레기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미 내 안에서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야기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이미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그가 주는 헷깔리는 신호들을 무시하거나 놓치고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가져올 큰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내가 편한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나와 같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왜 섹스에 대해서 언급했냐고 거듭 묻자 그가 대답했다. 자신은 우리가 통화하던 도중에 대화가 잘 통하고 즐겁다는 것을 느꼈고, "이건 좋은 연애 상대로서의 한 조건이 아닐까?"를 생각하자 우리가 함께 있는 미래가 그려졌다고 했다. 나이 먹은 둘이 한 공간에 있는 그림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자주 그리던 그와의 미래 그림과 많이 닮아 있는 듯 했다. 다만 내가 그린 이미지는 좀더 하우스메이트 같은 이미지에 가까웠고 그 사이에 둘 사이의 섹슈얼한 느낌은 전무했었다. 왜냐하면 그와의 그때까지의 관계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 그는 우리 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둘 사이의 섹슈얼한 관계를 떠올렸고, 그때부터는 섹슈얼한 이미지가 그를 지배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했다. 결국 그도 섹스에 사로잡혀서 관계에 대한 충분한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그의 충분한 고려와 생각은 적어도 내가 그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생각했던 고려와 생각들보다 훨씬 적었을 수 있었다. 나는 그와의 미래를 종종 그렸었고, 그 가능성의 바닥에는 적어도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문화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그 지난함, 살 곳에 대한 고려, 그럼에도 그런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서 같은 문화권의 가까운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선택할 만큼의 확신과 큰 마음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단순히 '어? 이 사람 괜찮은데? 한번 데이트 해볼까? 해보고 별로면 말고.'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와 쌓아올린 7년간의 친구 관계가 있었고, 쉽게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이미 둘 사이이에 있는 거리와 문화적 장벽이 너무나 분명했다. 내가 그와 연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장애물과 장벽을 고려한 후에 그럼에도 그와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고, 내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도 당연히 나의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멋대로 추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의 관계를 논한다는 것은 우리의 7년간의 우정도, 우리가 가지게 될 장애물도 너무나 가볍게 보거나 아예 고려를 안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섹스에 대한 충동은 이러한 매우 단순한 많은 고려 사항들조차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을까? 그가 섹스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나를 설득할 그 많은 통화 속에서, 그는 내가 그의 그 모든 말을 그가 얼마나 나와 사귀고 싶은지로 바꿔 듣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혹은 나는 그의 말을 얼마나 혼자 번역해서 듣고 있었던 것일까?
미래에 대한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고도 그에 대한 반응을 달리 했듯이 그와 나는 비슷한 용어와 표현을 쓰고 있었지만 그 속 뜻은 달랐다. 그리고 서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채 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제기하는 문제가 단순히 내가 섹스를 안좋아하는데 그는 섹스를 좋아해서 섹스가 얼마나 좋고 재밌는 것인지 나에게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나는 섹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가 나에게 이미 사귀고 싶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여겼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사귀지 않는 상태의 섹스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그는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섹스 어필을 하고 있는 자체로 내 안에서 그는 이미 관계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상태였고, 그의 안에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일반적인 많은 행동양식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섹스를 좋아할 거라고 여겼다며 그게 아닌 것 같은 당황스러움만 표현했다. 마치 섹스를 거부하는 것이 전근대적인 낡은 사고방식의 하나라고 말하는 듯이 나를 설득하기에 바빴다.
내가 섹스 과정 속에서도 특히 삽입을 안좋아하고 그것은 임신의 위험성 때문이라고 말 해도, 그는 그렇다고 임신을 하게 될 경우의 책임에 대해서 얼버무렸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에 너는 리스크가 적지 않냐, 너는 내 몸이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생각하는가, 중절을 하게 되면 돈을 지불할 의향은 있는가 그렇지만 그에 따른 마음의 상처와 죄책감은 또 어떻게 할것인가를 물었을때 그는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전 여자친구들이 얼마나 삽입을 좋아했으며 그걸 안좋아한다고 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가를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나에게 피임약과 피임기구의 유용함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임약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도 싫고, 여자의 피임기구는 남자의 피임기구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고 나는 삽입의 즐거움 하나를 위해 그러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남자는 피임도 훨씬 간단하다고, 네가 묶는건 어떠냐고 묻자 또 묶는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내가 가질 불편함과 위험과 리스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겪는 불편함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쳐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러한 이중적인 잣대를 이 당시에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는 그저 그에게는 사귀려면 섹스가 그리고 삽입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어필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