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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Oct 12. 2024

회피형 나르시시스트 (5) 비난의 시작

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비행기를 타고 챈들러의 집으로 가기 전까지 3주의 시간. 우리는 매일 통화를 했다. 대부분은 섹스에 관한 논쟁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챈들러는 사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과정이라고는 믿기기 어려운 말들을 종종 내뱉기도 했다. 그가 주는 이중적인 신호들은 항상 나를 헷깔리게 만들었고, 내가 알던 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는 나와 사귀기 전에 다른 사람과 오랫동안 성관계를 포함한 데이트를 했었다. 그렇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고,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고 명시했다. 헤어진 원인도 생일날 "나는 네 남자친구가 아닌데."라고 말하며 헤어졌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통화를 하다가 나에게 그가 말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들하고만 엮이는거지?" 나와 그 전에 데이트를 하던 그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나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며, 또한 그러한 사람과 연애하는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을 서슴없이 나에게 내뱉는 이야기였다. 친구로 지내는 7년동안 그에게서 직접적인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때는 알지 못한채 그저 당황했다.


어느 날은 한동안 통화를 하다가 챈들러를 보지 않은지 이미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며,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로 서로의 모습을 본 지도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을 기억했다. 1년 사이에 나는 살이 쪘고,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할 정도로 갑자기 불어난 체중 때문에 조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최근에 살이 쪄서 오랜만에 볼 것이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마음 속에는 그런 것은 상관 없다고 부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채 내뱉은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참담했다. "뭐라고? 살이 쪘다고? 나는 이전에도 네 외모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어. 그런데 살까지 쪘다고? 나는 마른 여자를 좋아한단 말이야." 이 거침없는 이야기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이것이 나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연애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친구로서도 외모에 대한 평가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실제로 외모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들어본 기억도 많지 않다.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외향이라고 느꼈고 그런 경험을 쌓아오기도 했다. 스스로에 대한 외모 자신감이 낮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자신을 부정할 만큼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거침없는 그의 말은 전혀 상냥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 통화에서 더불어 정신적인 영역까지 마구 공격을 했다. "네 이야기는 재미가 없어. 네 이야기를 들으려면 수행하면서 들어야해." 나는 거기에 내 이야기가 재미없이 흐르면 이야기를 끊지 수행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친구로서 있을때 한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모두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과 말 일거수 일투족이 평가대에 올랐고 그것에 대한 박한 평가가 끊임없이 날아왔다.

7년간 나에게 그는 나의 편이 되어주는 친구였다. 서로 연락은 자주 안해도 삶의 중요한 사건이 있으면 언제나 그것을 공유했다. 그가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축하해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나 일반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냐와는 관계가 없는 어떤 신뢰와 믿음이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비평은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비평을 처리하고자 나도 모르게 고분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에게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나에게 아직도 그는 소중한 친구였고, 거기에 얹어서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될 수 있을지를 서로 논의해보는 과정에 있었으며, 내가 친구에게 가지는 스탠스는 무언의 응원이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비난을 떠올리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그 극심한 입장 차이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고 멋대로 기대한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는 차츰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간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있던 모습이 드러난 것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거나 살펴볼 겨를도 없는 채로 나는 매번 당황하며 그와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내 삶의 위기를 극복한 것을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대화 도중에 "이제 너를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나를 좀더 이해하게 되고 더 가깝게 느끼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너는 네 삶의 위기를 극복한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제대로 애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네 마음과 정신이 불균형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 맥락이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이해'였다. '이해'이기 이전에 프레임 씌우기였다. 결국 그 말은 '너는 결국 그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구나의 다른 이야기이다. 이러한 평가가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었다.


나는 특수한 체질로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주던 친구로 여겼던 그는 어린아이 목소리를 차갑게 거부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대화가 불가능한 목소리"라고 했다. 어린아이 목소리는, 무의식의 내면아이의 목소리에 가까운 것으로 상처받은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결국은 내면아이도 정화가 되면 순수한 영혼이었고, 이 무의식의 마음들은 챈들러를 신뢰하고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의 급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했다. 그 이전까지 5년의 시간동안 한번도 듣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나아가서 나의 웃는 얼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여러차례 이야기했다. 웃는 얼굴은 가면이자, 잠자면서 걸어다니는 듯한 모습이고, 그저 긴장한 얼굴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이것이 그의 통찰력인지 혹은 비난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어온 터였다. 어쩌면 그러한 많은 피드백들이 웃는 습관을 강화했을 수는 있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지도 않았다. 습관적으로 웃는 얼굴이 되어 있는 터였다. 그리고 그 습관을 재인식하고 다시 웃는 얼굴을 없애기조차 어려웠으며 그것은 내 얼굴을 더욱 긴장하고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삶의 여러순간에 마음이 즐겁고 노래해서 마음으로부터 웃는 순간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최근에는 그런 순간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었다. 어색할 때, 마음이 안좋을때도 습관적으로 웃는 얼굴이 되곤 했지만 내 의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러한 내 이야기를 하며 내 모습을 보며 "혐오감이 일었었다."고 말했다. "혐오감"이라는 단어는 호감이 있어서 연애를 시작할까를 고민하는 대화를 하는 사이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진 단어였다. "나는 네게 혐오감이 있었다."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너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고도 분명히 말했다. 7년동안의 친구 관계에서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연애를 이야기하는 단계에서 굳이 그는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비난의 화살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받아들여야할 줄 몰랐다.

나중에서야 그는 "나는 네가 긴장이 풀려있을 때 네 몸에도, 네 외모에도 매력을 느껴."라고 말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 한들 그가 말한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귀로만 듣고 판단을 내린 살찜에 대한 부정, "네 외모가 매력적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어.", "네게 혐오감이 있었다."는 말 등이 씻겨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이중 신호들과 이중적인 이야기로 나는 헷깔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너의 마음이야? 왜 너는 상반된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거야? 내 뇌는 상반된 신호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혼란스러워했다.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커져가고 있던 마음은 그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었다. 내 안에 그러한 불안감이 커져가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그와 논쟁이 점철된 대화를 계속해나갔다. 


내가 "애도"를 제대로 못했다는 그의 평가에, 그의 애도 과정에 대해 물었고,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외로움이나 고독감 등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며 해결해나가려 했는지 사고 과정을 설명했다. 나는 위기나 상처를 항상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완전히 결이 달랐지만 그의 방법을 따른다기 보다는 그저 그의 전개 방식에 조금은 흥미를 느끼며 듣기도 했다. 마음의 접근은 내가 스스로 삶의 위기 이후에 조금씩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잘 하지 못하는 분야라고 예전부터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조차 당시에는 큰 상관이 없었다. 다소 마음이 닫혀 있어도, 공감을 잘 못하는 편이라고 해도, 그는 나에게 7년간의 소중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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