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뚜르르르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다시 받았다.
장장 3시간동안 우리는 통화를 했다.
이미 이 통화는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고 그가 말했던, 그가 그의 생각을 가만히 전개해가고, 나는 그의 생각에 100%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의 전개를 듣고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즐기며 가만히 듣고 있던 그런 서로가 기분좋은 통화가 더이상 아니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입장을 설명했고, 그는 그의 입장을 변명했다. 우리의 친구로서의 산뜻한 대화는 어쩌면 이 시점에서 많이 끝나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사귀지 않는 사이에서의 섹스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배경으로 섹스의 정의에 대한 접근이 다르다는 것을 피력했고, 그는 그대로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미끌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 섹스에 관한 피력을 단순히 나의 섹스에 대한 취향 내지는 접근으로 듣고, 자신이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고 한 말이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두가지 갈래로 들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섹스와 나쁜 섹스, 즉 쌍방이 동의하는 섹스와 쌍방이 동의하지 않는 섹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피력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섹스 자체가 관계에 있어서 중요도가 크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기에 이 말 역시 어느정도 맞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섹스를 좋아하느냐 아니냐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섹스를 하는 상황을 더 편하게 느끼냐 아니면 불쾌하게 느끼는가의 차이였다.
아무리 처녀막 신화가 있었고 보수적인 시선들이 자리했던 한국사회였지만 사귀는 사이에서 섹스는 흔한 일이었다. 물론 원나잇 스탠드 등도 존재하지만, 진지한 관계에서의 섹스와 섹스 자체를 위한 관계에서의 섹스가 좀더 선이 분명한 느낌이 내 안에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도 내 안에서는 흑 아니면 백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안의 섹스는 흑도, 백도 아닌 것이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전달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말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이 당시에 알 수 없었다.
결국 사귀지 않는 사이에서의 섹스는 원하지 않는 섹스가 되고, 그것이 데이트 강간 같은 느낌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이러한 나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이후로 그는 자신의 과거 섹스 경험을 공유했다. 미성년인 어린 시절부터 관계한 10명 정도의 여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이름이 귀에 남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릴리였다. 2년정도 동거를 했던 여자친구라고 했다.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섹스 파트너에 가까운 여자라는 인상을 그의 이야기 속에서 느꼈다.
그는 섹스가 얼마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를 피력하며 섹스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것은 내가 섹스 자체를 거부하고 섹스를 싫어한다고 그가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불편하게 여기고 거부하는 섹스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가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섹스, 사귀지 않는 사이에서의 섹스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혹은 그 부분을 흘리거나 넘겨들었다.
그는 내가 원하지 않는한 섹스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사실은 너는 나와의 섹스를 즐길 것이며, 우리가 같이 있게되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될지 상상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은 하루에 여러번 자위를 하고 있으며, 성욕이 극에 달해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와의 사귐에 있어서 섹스 자체는 너무나 중요해보였다.
사귄지 일주일은 섹스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으로 느껴졌다. 마음에 들면 마지막날 키스를 하려나? 정도의 사고에 머물러있던 나는 그의 섹스 어필에 계속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귀에는 계속 그가 우리를 '사귀는 사이'로 이미 정의하고 있다고 들렸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는 사귀지 않는 사이의 섹스가 정립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한국으로 치자면 사귄지 100일 이내의 커플 단계에는 들어와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했고,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애정이 있었어."라는 말을 했다. 이 두가지 말은 내가 그가 나와 사귐을 이미 긍정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의 무한 섹스 어필에, 그를 받아주는 것이 좋을까를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체 접촉에 있어서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범위를 분명히 공유했다. 그 말은 그에게 어느정도로 전달되었는가? 내가 이 관계를 좀더 분명히 설정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가 내 말을 듣고 알아서 나의 말을 지켜줄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의 행동을 제지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나는 상대가 알아서 나를 배려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능동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의 배려가 아닌 내가 끊는 관계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그러한 나의 태도는 그의 의도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대화는 더이상 우리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섹스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어버렸고, 그 속에서 관계 자체에 대한 논의는 애매모호해져갔다. 나에게는 섹스에 대한 논의는 이미 관계가 정의된 후의 논의였고, 그에게는 아니였다.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상상했지만 사실은 속에서 계속 겉돌고 있었다. 같은 단어, 같은 용어의 의미가 서로 안에서 달랐다.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는 말도 달랐으며, 연애하는 사이의 사랑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감도 달랐고, 섹스에 관한 입장도 달랐다. 그 모든 차이를 제대로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착각한 채 계속해서 대화를 해나갔다.
대화는 잘 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했다. 대화라기 보다는 언쟁과 논쟁에 가까울 때도 많았고 그래서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친구 관계로 대화할 때는 좀처럼 있지 않았던 일이다. 이야기는 제자리를 맴도는 듯 앞으로 나아가는 듯 애매했다.
그의 태도도 그의 마음도 대화 속에서 불분명했다.
서로가 결혼관과 연애관에 대한 문서를 적어서 나누어 읽어보기도 했다. 그에게는 섹스가 중요함이 명시되어 있었고 나와의 다른 섹스에 대한 생각이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좋은 연인이 될 조건으로 부족해보인다고 어필했다. 그는 마치 나와 사귀기 위해서는 나도 그만큼 섹스를 편해하고 좋아해야한다고 무언중에 계속 압박을 주는 듯 했다. 그 압박은 견디기 어려웠고, 적어도 사귀는 사이 속에서의 섹스는 조금은 용납이 되는 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섹스 어필을 하는 그는 이미 나를 여자친구로 여긴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안에서는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태도 자체가 성립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나도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리고 섹스는 그러한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장 애매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였다.
나는 그와의 연애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나의 그 마음은 그가 나와의 연애 가능성을 보고 싶은 마음과 달랐다. 왜냐하면 연애 가능성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는 이미 사귐을 시도하는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사귐 자체를 안하는 사이에서 사귀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에 관한 가능성을 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는 극명하게 컸다. 한쪽은 이미 관계가 정의되어서 관계 안에서의 서로의 조율을 고민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관계가 정의되지 않은 채 관계의 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지 자체를 고민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귀지 않고는 신체 접촉이나 데이트를 불가능하게 여기는 나와, 신체접촉이나 데이트를 충분히 한 이후에야 관계를 정의할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그와의 차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연애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이미 둘 사이에 커다란 의미 차이가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서로의 말을 서로가 듣기 좋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관계의 정의가 늦는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상대는 관계의 정의를 일찍 하는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끝이 없는 섹스 논쟁 자체 뒤에 숨은 관계 정의 논쟁에 눈치채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