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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Oct 10. 2024

회피형 나르시시스트 (3) 혼란의 시작

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나는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는 그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2일이 지났다.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고 편지를 쓰는 것을 선택했다. 당장 큰 어떤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보다 현재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주목하고 싶었다. 편지는 천천히 그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동안 적어가며 내 현재 상태가 정리되기도 한다. 그런 점이 좋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나는 그에게 바로 문자를 보내는 대신에 그에게 보낼 편지에 적었다. 편지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편이 낫게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따로 소화되어야 될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그에게 보낼 편지를 쭉 적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2일만에 그에게 문자가 왔다. 보통 몇달 사이의 텀으로 드문 드문 근황이나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었기에 2일은 굉장히 빠른 텀이었다. 

언제나의 우리의 연락처럼 그의 문자는 앞뒤 맥락이 없는 본론이었다.

"참고로 말하는 건데, 앞으로 한 5주간 룸메이트가 여행을 가게 되어서 나 혼자 집에 있게 되었어. 너를 초대하기에 좋을 것 같아."

굉장히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문득 "너 당장 날아갈 것 같아"라는 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따로 머물 곳을 빌리지 않고 놀러갈 수 있는 것은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챈들러의 초대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가고 싶었던 곳이었고, 챈들러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어도 친구로서라도 챈들러가 사는 곳은 한번쯤 놀러가 보고 싶은 곳이었기도 했다. 좋은 기회로 느껴졌고 그렇다면 망설일 틈이 없었다. 비행기 값는 날이 갈수록 올라갈 뿐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챈들러에게 잠깐 통화하자고 하고 날짜를 상의했다. 가는 시간은 지금 부터 3주 후, 6일간으로 정해졌다. 짧았지만 지금은 휴가 때가 아니라 직장을 길게 비울 수가 없었고 3주 후에는 한달 전부터 준비하던 공연도 있어서 공연을 중도 하차할 수도 없었다. 즉, 공연이 끝난 다음날부터의 짧은 6일의 여행이 내가 시간을 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날짜를 정하고서는 일사천리였다. 일단 바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처음 가는 곳이라 더 헤맬 요소가 있는 환승보다는 직항 비행기를 찾았다. 비자를 알아보고, 그 나라에 가기 위한 준비물과 여행 정보를 모았다. 보통 해외 여행이라면 3주 전에 준비한다는 것도 조금은 말도 안되고 촉박한 상황이었지만, 이 흔치 않은 찬스를 활용하고 싶었다. 이미 이 속에서 나는 다른 것들을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러한 준비 속에서 근본적인 냉정함은 없었다. 편지로 천천히 둘의 관계나 연애 자체에 대한 나의 마음을 돌아보던 마음도 사라졌다. 시간이 없었다. 3주는 해외 여행을 준비하기에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사귀지 않을 것이면 친구로 놀러가는 마음으로 가도 될 것 같아서 가는 마음을 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가서 할일들을 알아보았다. 가서 피아노를 연습할 스튜디오를 알아보기도 하고, 댄스 클래스와 파티들을 알아보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도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재미있는 것들을 하고, 그 나라를 알아가는데 시간을 쓰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챈들러는 나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궁금했다. 챈들러에게 전화했다.


"챈들러, 혹시 이번에 내가 가면 나와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가벼운 여행 계획을 짜며 챈들러는 나와 어느정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 생각인지 궁금해서 가볍게 물어본 질문이었다. 우리는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사이인데다가 6일 안에 사귀게 된다 하더라도 가벼운 데이트가 가능할까 의문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내가 오직 생각하는 것은 섹스 뿐이야."

귀를 의심하는 말이 들려왔다. 

응??? 과연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거지????

현재 들은 이야기가 소화되지 않았다.

"그래,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그리고 나는 다시 여행을 위한 실질적인 질문들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 "우리 집에 초대하기 좋을 것 같아.", "섹스할 생각밖에 안나."

이 세가지는 우리의 관계를 바꾸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이전의 천천히 그와의 관계를 생각해가며 천천히 그에 관해서, 그리고 내 안에서의 연애의 개념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해가던 과정이 완전히 멈추었다. 나는 이때부터 이미 어딘가 스위치가 켜쳐서 그저 반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경고등이 울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듣거나 볼 여유조차 없을정도로 몰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는 그의 말을 "네가 좋아. 너랑 사귀고 싶어."로 번역해서 들었듯이 내 마음은 "섹스할 생각밖에 안나."는 그의 말을 번역하고자 시도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 직접적이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그의 말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생각 회로가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아니 내가 들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하지?


나는 매주 한번씩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일주일간의 근황을 나누고 그 사이 자신이 성찰한 부분들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솔직하게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아니 무슨 그런 쓰레기가 다 있어?"

그렇지..?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아니 설마 챈들러가 그렇게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친구였나...? 이것은 무엇이지? 상황이 소화가 되지 않았다.

7년간 너무나 애뜻한 친구였던 그와, 현재 말을 하는 그가 매칭이 되지 않았다. 아니 내가 아는 챈들러는 결코 쓰레기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나를 그렇게 대할리 없는 친구였다. 그러한 믿음이 강하게 있었다. 그러나 그런만큼 실제로 들려온 말과 거기에 한쪽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반응해버리는 내가 있었다. 아니 그런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잖아!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는, 그것도 나한테?

그런 마음이 이미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이미 관계에서의 적신호였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나는 이미 내 안에서의 고찰이나 성찰 그를 통한 내가 내리는 선택을 하기도 전에 반응을 하고 있었다. 눈 앞에 불을 끄기 바쁜 시간이 시작되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2일간 평화롭게 편지나 쓰고 있던 내 모습은 이 날을 기점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확인해야 하고 그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내가 원하는 바의 의미와 번역으로 재해석해서 들으려고 하는 내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시작한 관계의 조종과 통제, 협박과 강요의 조용한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내 안에 번지고 있는 불을 끄기 위한 전력투구를 하기에 그저 바빴다. 내 마음에서 실제로 깊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 비행기는 3주 후였다.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애매하고 이상한 마음인 채로 챈들러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섹스라고? 그럼 적어도 그 섹스라는 말이 어울리는 관계가 우리는 되어야 할게 아니야? 우리는 그냥 친구인데 섹스 이야기를 꺼낸다고? 이것은 네가 쓰레기고, 우리 관계를 아무것도 아니게 본다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네가 설마 그런애라고? 아닌거지? 너의 진짜 마음은 어떤거야? 너는 대체 무슨 의도로,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거야? 너무 혼란스러워. 알려줘. 너무 고통스러워.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너에게 있어서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거야? 나는 무엇이야?


우리의 관계는 시작 전부터 이렇게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왜냐하면 관계의 시작이 상대에 대한 호감 표현이 아니라 성적 호감에 집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저 나에게 성적 호감을 느껴서 그것을 해소하려 한다고 해석하기에는 그와 알고 지낸 7년의 시간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다. 우리는 3~4개월에 한두번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고 1년에 한번이 될까 말까하게 통화를 하는 사이었지만, 적어도 내 안에는 상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고마움, 우정이 있었다. 이 우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아무리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한들 챈들러는 이미 내 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존재가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존재를 떠올리는 것으로 미소가 떠오르고, 마음에 힘이 되는 사이. 그는 이미 나에게 그런 존재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그가 나를 그저 자신의 성욕 풀이 대상으로 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내 안의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에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내 안에는 이미 그가 보내는 헷깔리는 신호들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우리 관계는 이미 이날을 기점으로 어그러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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