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별의 불가능성
"나,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
통화 중에 갑자기 그가 말했다.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와의 먼 미래를 가끔 그러보곤 했다. 내가 그린 먼 미래는 딱히 섹슈얼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굉장히 담백하고 편안한 관계였다. 그와 같이 있는 미래를 그리면 그렇게 한 공간에 그와 내가 편안하게 앉아있고 어딘가 햇살이 쏟아지고 각자는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광경이 그려지곤 했다. 편안했고 자연스러웠고 좋은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할 마음은 없었지만 작은 짝사랑처럼 느꼈었다.
그래서 그의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않은 급작스러운 말이었다.
"나 이번에 섹스를 했어! 얼마만인지!"
"나 이번에 일하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나 같이 일하던 여자랑 일 더 이상 같이 안 하기로 했어. 거의 사귀다가 헤어진 것 같은 느낌이야."
이렇게 항상 자신의 연애 소식을 간간히 전하던 그였다. 그의 근황 이야기를 간간히 듣는 것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전혀 그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인을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보내는 것 같아서 아주 살짝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었다. 딱히 엄청나게 그에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상 외'판정의 쓸쓸함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만난 지 7년 만에 갑자기 처음으로 나에게 "나,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고 말한 것이다.
굉장히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자신의 한 부분이 비로소 긍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조금 마음이 설레었다. 그가 조금씩 마음에서 좋아지고 있었던 차였다. 그 발단은 한 달 전의 편지였다.
당시 단기적으로 풀타임 잡을 시작한 나는 예상과는 다른 일의 성격에 엄청난 고충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프리랜서로 하던 다른 일이 적성에도 맞고 보람에도 맞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고 3일 만에 그만두고 싶었다. 직접 지원한 포지션이 아니라 지인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회사라서 더 그랬다. 인생의 잠깐이라면 풀타임 잡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던 나는 직장이 시작되고 나서 자신의 안일함에 당황했다. 일 자체는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독립적인 일이었으며 일자체의 스트레스가 크지 않을 수 있는 일임에도 그랬다. 사무직의 기본 업무, 엑셀을 쳐다보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복사 붙여 넣기 복사 붙여 넣기 복사 붙여 넣기를 하며 프리랜서로 일할 때의 일의 창조성과 자유도에 대해서 다시 절감했다. 회사의 톱니바퀴가 된 느낌이었다. 이는 소속감과 일 자체의 중요성을 느끼게도 해주었지만 이미 다른 좋아하는 직업이 있는 상태에서는 끝나지 않는 복사 붙여 넣기의 행진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심지어 매크로를 만들고 회사 시스템 관리 쪽에 전화해서 복사 붙여 넣기 과정을 줄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과 함께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고, 그만둘 날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원래 직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후임이 오고 일을 잘 넘겨줄 때까지는 일을 잘 마무리해야 했다.
사무실은 매우 추웠고, 창밖으로 나무하나 보이지 않고 항상 블라인드가 쳐져있었다. 그 추운 사무실에 종일 갇혀서 하는 복사 붙여 넣기 행진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책상 위에 초록색 화분이라도 하나 사면 나을까 해서 화분을 하나 주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년에 거의 8개월 전에 통화를 할 때 챈들러가 언급했던 식물 키우는 방법과 그가 사용하던 독특한 모양의 물 주기 통이 떠올랐다. 나는 업무를 하다 말고 챈들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문득 생각이 어떤 계기로 나거나 소식을 전할 일이 생기면 간간히 메시지를 보내고 안부를 전하던 그였지만 그리 자주 연락은 하지 않고 있었다. 뜬금없는 연락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연락은 항상 그런 식이 었기 때문에 아주 간편하게 본론만 물어봤다.
"잘 지내?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 네가 보여줬던 식물 물 주는 통, 이름 같은 게 있어?"
곧바로 챈들러에게서 웹사이트 주소가 날아왔다. 아 이런 이름의 통을 사면 되는구나. 그는 병원에서 쓰는 약물 통을 식물 물 주기 통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그 정보를 따로 메모하면서 한국 웹사이트에서 동일한 물통을 구입할 수 있는지 검색해보려고 했는데 다시 메시지가 왔다.
"메일 주소를 알려줄 수 있어?"
'응? 내가 내 메일 주소를 안 알려줬었던가?' 하며 나는 나의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랬더니 다시 답장이 왔다. "아니 이메일 말고 실제 우편 주소."
그제야 챈들러가 묻는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깨닫고 나는 다시 집 주소를 알려줬다.
"설마 한국에 찾아올 일은 없을 테고..."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정말 설마였기 때문에 그 생각도, 주소를 알려준 사건도 머릿속에서 금세 잊혔다.
식물도, 챈들러가 알려준 물통도 결국은 회사에서 쓰게 될 일은 없었다. 회사 업무와 스트레스와 추운 사무실의 영향으로 나는 결국 지독한 A형 독감에 걸렸고, 독감은 사직서를 결단하는 것을 도와줬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지친 풀타임잡 업무로 쓰러져갈 때,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낯선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편지봉투에는 챈들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세상에, 편지라니, 이 디지털 시대에 편지를 받아볼 일이 있다니, 책상 위에 놓인 정갈한 편지봉투를 보며 감회에 휩싸였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몇 겹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문구는 내 이름 앞에 쓰여 있는 문구 Dearest였다. 노래 가사에서나 알았던 이 문구가 나를 향해 쓰인 것을 처음 보고 놀랐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한 일상의 공유였지만 편지가 온 타이밍의 따뜻함과 종이 편지가 가진 특유의 느낌에 마음이 녹았다. 편지 자체는 손글씨가 아니라 타자기로 친 것이었지만 그 낡은 타자기 잉크 느낌을 따라가는 것도 좋았다. 그 편지가 사직서를 낼 결단을 도와주었다. 나는 곧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최근에 풀타임 잡을 시작 해서 고전하고 있는 것, 그리고 조만간 그만둘 예정인 것을 편지 안에 담았다.
편지가 전해준 따뜻함으로 나는 잊고 있던 그를 다시 떠올렸다. 그가 좀 더 마음에서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는 한 번도 로맨틱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와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예전의 작은 미래에 대한 상상과 더불어서 이러한 상상을 챈들러에게 직접 말할 생각은 없었다. 혼자만의 작은 상상이었다.
그랬던 상상 속의 그가, 수화기 저편에서 말한 것이다.
"나,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이 맞는지 확실치 않았다. 항상 '논외'판정을 나에게 하던 그가 맞는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말을 잊기 시작했다.
"고마워. 사실은 나도 너와의 미래를 그려보곤 했었어."
그리고 이때 알았어야 했다. 이때부터 너무나 많은 오해와 굴곡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챈들러는 나에게 "나는 네가 좋아. 너와 사귀고 싶어."라고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나에게 "나,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그와의 지금까지의 친구로서의 깊은 관계성과 섹스가 한국에서 의미하는 바인 사귀는 사람이 아니면 잘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선입견이 섞인 감정으로 내 멋대로 "나는 네가 좋아. 너와 사귀고 싶어."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리고 내 대답 "고마워."는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결코 '나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줘서'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이러한 미스커뮤니케이션, 오해는 챈들러와의 앞으로의 대화에서 주축을 이루었다. 친구 사이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다 친구 사이에서 우리는 한 번도 '우리 관계'에 대해 논한 적이 없었으며 '우리가 무슨 사이이지?'를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와는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이가 되었고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종종 생겨났으며 그러면서 조금씩 관계 안에서 우정과도 같은 관계가 싹텄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를 질문하거나 논하거나 혹은 어떤 관계가 되어야지 하고 미리 추구하거나 해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었다. 모든 친구 관계가 그럴 수 있듯이 우리 관계는 열려 있었고 아무 제약도 없었으며 내가 문득 챈들러가 보여주었던 물 주기 통이 생각나서 갑자기 앞뒤 없이 연락을 했듯이 언제든 어떤 주제로든 서로가 생각나면 그렇게 오랜 시간만에도 연락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의 존재 자체에 감사했고, 잠깐씩 주고받는 안부는 일상의 힘이 되기도 했다. 가끔 긴 통화를 하거나 할 때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에 바로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연락은 일상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한때 거의 매일 연락하던 때도 있었지만, 특수했던 경우로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이번 통화도 1년 남짓만의 통화였다. 간간히 문자는 주고받았지만 통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직장을 드디어 그만두게 되어서, 편지에 이미 직장 관련 이야기를 적었기 때문에 간단히 메시지로 그 보고를 했고, 그에게 전화가 왔으나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철을 타는데 그간 풀타임잡의 스트레스와 가족관계와 더불어 힘든 마음이 올라와서 문득 최근에 연락했던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지금은 소리를 듣기가 힘드니 새 직장의 일이 끝나면 전화를 달라고 부탁했다. 새 직장은 원래 하던 프리랜서 일로, 다시 마음 뛰는 삶으로 돌아간 느낌을 주었다. 직장이 끝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통화했다. 가만히 아주 천천히 생각을 전개시켜 나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를 그저 가만히 들으면서 이런 생각의 공유가 좋다고 느꼈다. 내가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생각이나 견해를 듣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이후에 받아서 다시 나도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미안, 내가 네 말에 집중하기가 좀 힘든 것 같아."라는 말을 하더니 그 이후에서야 예의 "나, 너에게 섹슈얼한 감정을 느껴."라는 말이 나왔다.
정말 아무런 전조도, 느낌도 없는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