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The Door)>를 읽고 떠오른 문장이다.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에메렌츠,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화자의 직업은 작가다. 화자와 그녀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에메렌츠에 관한 이야기다.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이 들어간다. 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한쪽이 굳게 닫아버린 문. 그 문을 열기란 문을 닫아 버린 사람도 그 문 안쪽이 궁금한 사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씩 열리는 듯하던 그 문을 결국에는 강제로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 낸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동유럽 국가인 헝가리 작가의 소설이다. 헝가리에서 외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낯선 작가다. 내가 읽은 책이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책을 구입해 읽는 그다지 썩 좋지 않은 독서 편력을 가진 내게는 그럴만하다. 이 책은 이번 달부터 시작한 독서모임의 다음 달 추천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중간에 신입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운명처럼 만난 책이다. 그 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추천을 하신 분이 문득 궁금해진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방이고, 외로움은 누구도 열어주지 않는 닫힌 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때때로 겹치기도 하고, 각각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고독이 시간이 지나 외로움으로 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외로움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아 고독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같은 공간도 고독이 될 수도, 외로움이 될 수도 있다.
고독은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상태로 묘사되곤 한다. 하이데거는 고독을 존재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상태로 보았다. 타인의 시선이나 일상적 수다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고독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반면 외로움은 타자와의 관계 단절이 주는 결핍에 따른 고통이다. 빅터 프랭클(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심리학자)은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했다. 외로움은 이 의미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없을 때 깊어진다. 그래서 외로움은 고독보다 더 수동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여겨지곤 한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고독과 외로움 사이를 헤맨다. 한쪽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다른 한쪽은 나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얼마 전 계획도 없이 그저 마음의 파도에 밀려 속초에 다녀온 적이 있다. 비가 잔잔히 내리는 한적한 바닷가를 우산도 없이 거닐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바람소리는 속삭이듯 파도소리는 자신 있게 내뱉듯 나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얼굴에 와닿는 빗방울조차 감정의 앙금을 씻어내듯 시원했다. 그것은 분명 고독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아도 내가 충분히 나로서 살아 있는 느낌. 나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시간들.
하지만, 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조용히 웃고 있던 어느 저녁. 날아오는 문장도 아닌 단어들에 맞장구를 치며 앉아 있었다. 누구와도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없었으며, 웃음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맴돌기만 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문장은 단어가 되어 떠돌고 주변에 사람은 있어도 나라는 존재가 그 안에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유령처럼 만져지지 않을 때.
결국 중요한 것은 혼자인가 아닌가 가 아니라, 혼자일 때의 나의 상태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스스로를 함께 있어줄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어찌 보면 고독은 스스로를 친구 삼는 연습이고, 외로움은 자신조차 곁에서 없어지는 감정이 아닌가 싶다.
헤르만 헤세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했다. 고독은 자유로운 상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을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묻어 두었던 상처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불편함조차도 나라는 사람을 이해해 가는 여정의 일부다.
우리는 누구나 외로움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대신, 고독을 환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혼자 있는 순간들마저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그 의미를 따라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면 타인 속에 자연스레 섞여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외롭지 않기 위해 타인을 찾고,
고독하기 위해 자신을 찾는다.
- 파울로 코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