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해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적과 똑같아지고 마는 것뿐이라고, 용서를 통해서만 더 큰 지혜로움과 지성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해 봐야 소용없으리라.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히말라야의 수도승들과 사막의 성자들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알레프> 중에서
쉬는 날이면 다 큰 아들을 직장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도서관으로 간다. 평소 아이는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걷기에는 먼 듯한 거리지만 걷는 게 좋다는 아이를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아이를 본받아야 하겠지만 내가 가는 도서관은 거기에서도 아들과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아이와 동승을 한다. 오전 아홉 시가 되어 가는 무렵의 길가에는 차량들이 많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방의 중소도시는 대도시의 러시아워처럼 신호를 몇 번씩이나 받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약간의 정체는 있으니 작은 도시라고 과소평가 말기를.
평소처럼 아이를 회사 부근에 내려주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막다른 삼거리에서 내 차는 우회전 차선에 상대 차량(도요타에서 만든 날쌘 경차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하 도요타라고 명한다)은 좌회전 차선에 있었다. 좌측으로는 아파트 공사 현장이라 좌회전하는 차량은 거의 없다. 우회전을 하면 40여 미터 전방에 삼거리가 또 나오는 편도 2차선 도로가 된다. 그 도로는 대부분 좌회전하는 차량들이다. 차선 자체도 두 개의 차선 모두 좌회전을 허용한다.
사건은 처음 나오는 막다른 삼거리에서 발단이 되었다. 분명 내 차선은 우회전만을 할 수 있는 차선이었고 도요타는 좌회전만 가능한 차선에서 주행을 하고 있었으며, 도요타는 내 왼쪽 약간 뒤쪽에 있었다. 그 차가 우회전을 하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내 차 뒤로 다른 차량은 없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당연히 우회전을 하려면 내 뒤로 차선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내 뒤에 차량이 있었다면 분명 사고가 났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나중에 든 생각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급정거를 해야 했고 뒤에 차가 있었다면 여지없이 추돌을 당했을 것이다. 도로의 상황이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다. 이해가 안 가도 좋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꼭 이해해야 하는 내용은 아니다.
내가 막 우회전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좌측에서 도요타가 머리를 들이대며 날쌔게 우회전을 했다. 내가 급정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차의 옆구리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차선위반(좌회전 전용 차로에서 우회전을 한 것이다)은 둘째 치고라도 도요타는 충분히 회전 반경을 넓혀서 우회전을 했다면 내가 급정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도요타 운전자는 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 버젓이 1차로의 신호대기 중인 차 뒤로 정차했다. 급정거를 한 나는 조수석 바닥으로 뒹굴어 버린 가방을 쳐다보며 잠시 멍해 있었다. 불쌍한 내 책들, 활자가 튕겨져 나오진 않았을까. 황당함에 욕도 안 나왔다. 그 뒤로 화가 치밀어 올라왔고. 순간 바닥에 뒤집어진 가방이 '날 위해 복수해 줘'하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차에서 내려 한마디 해주려 하는데 앞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호가 바뀐 것이다.
이쯤에서 내 분노에도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했다. 차를 출발시키며 화를 가라앉혀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들이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내면에서 다시 불꽃이 튀었다. 차마저도 씩씩 쇳소리를 내며 달렸다. 말이라도 한마디 날려 주겠다는 알량한 복수심에 가득 차 내가 무슨 정의의 기사가 된 듯 액셀을 밟았다. 차선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다른 차들을 추월해 도요타 옆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침 신호대기에 걸려 나란히 정차하게 되었다. 내리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 확인하려 차창으로 도요타 운전자를 살펴보았다. 내 예상과는 달리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아.. 무슨 말을 한담. 말 한마디 못 하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말았다.
도서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창문을 조금 내려 차가운 바깥공기로 열을 식혔다. 늦겨울의 찬바람이 '그나마 다행이야'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고는 없었다.
잠시 복수심에 잠식된 내 의지가 어이없는 촌극을 만들 수도 있었다. 처음 삼거리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면 분명 그것은 도요타가 원인이었겠지만, 그 이후 내가 도요타를 따라잡기 위해 곡예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탓이 된다. 두 개의 사건은 분명 한 사람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서로 다른 별개의 사고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아니 일으키고 말았다. 나 또한 다른 제삼자에게 감정의 상처를 입혔음이 틀림없다.
도요타 운전자는 모르고 한 실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은 내 의지가 만든 것이다. 결국 나는 도요타 운전자보다도 못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순간적인 감정으로 나 스스로를 바닥까지 몰아갔다. 양보를 했어야 했다. 감정의 양보. 분노에 가득 찬 감정을 아량에게 조금이라도 자리를 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양보는 행동으로 표현되지만 중요한 것은 감정의 양보가 아닐까 싶다.
위의 파울로 코엘료가 쓴 소설 <알레프>의 한 구절이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한편으로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에 방점을 찍어 본다.
그래 너를 용서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