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꿈을 추구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었다.
하지만 시도했다가 실패한다면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잘못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그저 가슴속에 꿈으로 간직하는 쪽을 택했다.
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 손이 떨렸다. 초록의 형광펜 줄은 직선이 아닌 바람에 일렁이는 호숫가의 물결이 되었다. 그 물결이 잦아들었을 때 호숫가에는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너무도 익숙한 나의 모습이었다. 늘 꿈은 희망사항으로 남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절해 버릴까 싶어 그저 희망사항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뒷걸음질 쳤던 적은 또 얼마나 되었던가.
어렸을 적 내 꿈은 과학자였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그 꿈은 구체성을 띄어 화학자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원하던 대학 화학과에 두 번 낙방했다. 더 시도해 보고도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기초과학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해서 잘 몰랐다. 내가 하고픈 것이 정말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돈을 벌려면, 취직을 잘하려면 경영학을 전공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나를 던져 버렸다. 취업은 잘 되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셀러리맨이 되어갔다. 그리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아니 꿈을 꿀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지나온 시간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선택이니까. 단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한 마음이 늘 떠나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길들의 미로 속을 헤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결핍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여전히 과학자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니 이러저러한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꿈은 늘 변하고 있었다. 거창한 꿈은 세월의 무게에 쪼그라들고 풍파에 쪼개져 아주 작아졌지만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꿈을 품고 살지만, 그것을 ‘현실‘이라는 무대에 올려놓기까지 수많은 망설임과 자기 검열을 행하고 있다. 가능성은 늘 존재했지만, 결과가 나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언제나 발목을 잡힌다. 그러고는 필경사 바틀비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선택의 자유는 항상 불안과 책임을 수반한다고 한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가졌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과 두려움이 자유를 짓누르기도 한다. '꿈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불안을 피하려는 실존적 회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끼고, 결국 도전 대신 익숙한 안정 속에 머무르려 한다. 꿈을 추구하는 것보다, 간직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으나, 그 선택은 곧 책임이라는 무게를 동반한다. 우리 역시 종종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었음에도 그 책임의 무게(실패의 가능성, 주변의 시선, 상실의 고통) 때문에 한 발을 내딛지 못한다.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은 삶' 또한 우리가 책임져야 할 선택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시도할 수 있는 용기 그 자체다. 꿈을 향한 시도가 이미 가치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크건 작건 꿈을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꿈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은 그것을 시도하고, 부딪히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과정 속에 있다. 시도하지 않은 꿈은 실패하지 않지만, 실현될 수도 없다. 꿈은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가능성의 현기증으로 흔들릴 때 두려움에 굴복하기보다 용기라는 지팡이를 잡는 것은 어떨까?. 자신을 믿고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밀고 나가는 것. 때로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할 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두려운 것은 실패에 대한 생각이다. 그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인용 :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