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덧없음을 깨닫지 않으리
힘들더라도 나는 다만 최선을 다해
끝과 마주하고 싶을 뿐.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다. 신이 내게 쥐어 준 시간은 정말 말 그대로 시작하자마자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신이 만들었을지 모른다. 시작의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신의 달콤한 묘약 같은 게 아닐까. 이미 써 버린 것을 다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다고 돌려줄 만큼 신이 너그러운지도 알 수는 없다.
반환점을 돌아 끝을 향해 간다. 끝이 있다는 것은 시작부터 알았다. 하지만 그 끝은 내가 꿈에서 그리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멀기만 해도 다행이다. 그 끝의 모습이 어떠할지, 어느 길로 가야 그 모습을 마주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목적지가 없다. 아니 반평생을 달려와 놓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 되나. 응. 말이 된다.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지 않은가?
답답한 마음에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중얼거려 본다.
나 : 신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자아 :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이 어디로 가는지는 왜 묻는 건데, 따라가려고?
나 : 그러면 안 되나? 신이 가는 길은 옳은 길 아닐까?
자아 : 네가 가기 싫어도 곧 신이 가는 길에 합류할 텐데 뭐가 그리 급해. 네가 가고 있는 길이나 계속 가시지.
나 :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 알 수 없으니 하는 말이잖아. 답답해서 그런다고.
자아 : 그러면 ‘닐 도날드 월쉬’가 쓴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처럼 너도 신과 이야기를 나눠 볼래?
나 : 그게 가능해?
자아 : 나를 영매로 쓰도록 도와줄게.
종교도 없고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도 없는 내가 신과 대화를 한다고? 그래도 어려서는 일요일마다 교회에도 충실히 나가고 어머님이 절에 가실 때는 운전도 해드리고 잠시 부처님 앞에서 멍하니 묵상도 했던 나다. 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못 본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눈을 감고(너무 힘주어 감으면 안 되고 지그시 감는다) 내 앞에 신이 앉아 있다고 상상한다.
묻고 싶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믿거나 말거나 따라 해 보시라. 저마다 모두 다른 성격의 신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신과 다르다고 나에게 따지지는 말자.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 : 신이시여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나이까?
신 : 복고풍의 어투로 묻지 마라. 나도 너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다시 묻거라. 그리고 나를 편하게 닉네임으로 불러라. 닉네임은 네 맘대로 해.
나 : 그래도 될까요? 그럼 ‘카오스’라는 닉네임으로 부를게요. 인간이 만들어 낸 최초 신의 이름. 카오스. 어때요?
신 : 좋다. 어차피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가능하니까. 너의 질문에 답을 할 차례구나. 네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
나 : 카오스님. 저는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을 모릅니다. 저를 인도해 주소서.
신 : 그런 말투 쓰지 말라니까.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잖아.
네가 가고 있는 길을 알고 싶어?
나 : 네 알고 싶어요. 카오스님.
신 : 음… 그러면 제물을 바쳐야지? 그럴 능력은 되나?
나 : 저는 반평생을 살면서 이미 많은 고통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신 :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많이 부족하다고 보는데. 너는 앞으로도 제물을 더 바쳐야 해.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 보이지? 그들은 너 보다 더 많은 제물을 바쳤어.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
나 : 제 눈에는 거저 얻어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신께서 편애하시는 것 같고.
신 : 그렇다면 네가 나한테 바친 제물을 하나 예를 들어봐.
내가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을 테니 확인해 보고 너에게 길을 보여줄지 말지를 결정할게.
나 : 저는 남들이 돈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이것저것 많이 해 보았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몇 년 전 일이죠. 코로나19가 세상을 뒤엎던 그때. 제가 마지막으로 한 일 말이에요. 브런치 카페를 운영하던 일 아시죠? 기억하셔야 해요. 이걸 기억 못 하면 당신은 일부의 사람들만 편애하시는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어요.
신 :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혹시 저장해 놓은 동영상이나 사진 같은 게 있으면 더 좋은데..
유튜브에서 볼 수는 없을까?
나 : 카오스님도 유튜브를 보시나요? 그거 대부분 거짓말만 있어요. 어떤 동영상에서 이렇게만 하면 벼락부자가 되고 어떤 것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해서 모두 보았죠. 하지만 얻은 것은 없고 시간만 축냈어요. 심지어 책값이나 강의료로 낸 수업료만 해도 적지 않아요.
신 : 그래 네 마음 이해가 간다. 하지만 유튜브 재미있던데… 그거 신인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니?
나 : 신도 거짓말을 합니까? 그걸 누가 믿어요?
신 : 나보다 유튜브를 믿는 친구들이 더 많을걸. 신은 거짓말 안 해. 다만 진담 같은 농담만 해.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 어떤 이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실패하고, 어떤 이는 진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기회를 날려 버리지. 하지만 그 반대로 성공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아. 어찌 받아들이고 해석하든 그것들을 어떻게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느냐에 따라 다른 삶이 되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공평하고 공정하면서 편애도 하지 않는 신이지.
나 : 역시 신답군요. 묻는 질문에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주제를 다른 데로 돌리시네요. 기억하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했던 장면 말이에요.
신 : (정말인 듯 건성인 듯 알듯 모를 듯) 어.. 어. 기억하지. 기억해.
나 :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카오스님의 생각은.
신 : (마지못해) 최선을 다한 것 같긴 해. 그런데…
나 : 그런데 뭐가 또 부족한가요?
신 : 최선을 다했다고 성공을 대가로 받아야만 한다는 믿음을 버려.
나 : 뭐라고요. 어이가 없네. 무언가를 하는데 대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신인 카오스 당신조차 저에게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잖아요.
신 : 말을 가려해라. 욱하는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꾸준하네. 신한테 어이가 없다니. 인간한테 많이 듣기는 했지만 너한테 직설적으로 들으니 기분이 안 좋네.
나 : 지나친 말씀을 드린 건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또 말 돌리고 계시네요.
신 : 그래, 사과를 받아들이마. 말 돌리는 연습을 좀 더 해야겠네. 유튜브가 낫겠니? 드라마가 더 좋을까? 말 돌리는 훈련을 하려면 어떤 걸 더 많이 봐야 할까?
나 : 그래도 드라마가 낫지 않을까요?(이건 뭐지.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으니) 또 말려들 줄 알았죠. 이제는 답을 주셔야죠?!
신 : 그래 이제는 대화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인간이 또 불러댄다. 네가 최선을 다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있어. 요거는 대가 없이 알려 줄게. 마음 풀어라.
나 : 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요?
신 : 꾸준함. 그것에 필요한 끈기, 인내. 마지막으로 용기.
나 : 꾸준함은 이해해요. 하지만 용기는 무엇인지?
신 : 끝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말이야. 용기가 없으니 시작하기 어렵고 조금 가다가 끝이 허망해 보이거나 실패할 확률이 높아 보이거나 하면 포기하잖아. 그런 면에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꾸준함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가보는 용기가 너에게는 가장 부족한 것이야. 알겠니?
나 : 이제 알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신 : 아 그리고 원 모어 띵. 너에게 쓸데없이 과한 것에 대해서도 말해줄게. 본말전도나 갈아타기 잘하는 너의 장점 같지만 커다란 단점 말이야.
나 :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생각도 해 주셔야지요. 지루해요.
신 : 요놈 봐라. 그새 말 돌리는 걸 배웠네. 쓴소리는 듣기 싫다 이거지.
나 :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들어 볼게요.
신 : 들으면 뭐 하고, 알면 뭐 하나. 여태 그걸 몰랐다고? 너도 나처럼 거짓말을 잘하는구나. 나는 너고 너는 나야.
한 구절의 문장에 이끌려 있지도 않은 신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신에게 바라지만 말고 최선을 다한 후에 신에게 대들어 보자. 단 꾸준히 하고.ㅎㅎ
그리고 꼭 시간 내서 ‘원 모어 띵’에 대해서 꼭 대화를 나누어봐야겠다.
인용 : 이석원 에세이 <보통의 존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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