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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Oct 21. 2019

상처가 말을 걸 때

용기를 넘어 인간애


광주가 아닌 어딘가였다면 내 상상은 조금 더 밝은 쪽으로 향했을까.



얼마 전에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관련 미팅 건이 있어 급하게 잡은 출장이었다. 광주는 내게 얼음 같은 도시다. 여전히 그날의 아픔이 도처에 녹지 않고 남아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물론 예민한 자들만이 그 상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아무 정보도 없이 지금 그곳에 간다면 광주는 여타의 도시들과 별다름 없이 빛나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

일을 처리하고 광주역에서 늦은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한 노인이었다. 그는 대합실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사 왔을 것이 분명한 도시락을 대합실 가운데다 음료수병과 함께 펼쳐놓고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으로 가져갔다. 음식의 삼분의 일은 그의 입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은 머리를 빡빡 밀어 이제 막 출소한 사람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옷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노숙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과거가 어떻든 간에, 그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늦은 시간 대합실에서 민머리를 한 채 불편하게 밥을 먹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대합실의 사람들은 냄새가 번지는 그의 주변으로 가지 않았고, 대합실의 TV는 새로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종이컵에 물을 가지고 노인 앞으로 다가왔다. 그도 머리를 밀었다. 아들인 듯싶었지만, 어렴풋이 들려오는 대화로는 단정할 수 없었다. 노인 앞에 앉은 젊은이는 물끄러미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친숙한 얼굴을 한채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복지시설 같은 곳에서 함께 나온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들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어떤 것도 섣불리 추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 상상과는 달리 그들은 잠깐의 일탈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광주가 아닌 어딘가였다면 내 상상은 조금 더 밝은 쪽으로 향했을까. 도시가 가진 상처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노인과 젊은이는 기차를 탔는지 밥만 먹고 대합실을 떠났는지 알 길은 없다. 나는 플랫폼으로 내려와 그 도시를 떠나왔다.

늦은 밤 기차는 첨단의 속도로 달렸다. 어떤 것도 기차를 막을 수 없다는 듯이 맹렬하게 어둠을 갈랐다. 하지만 내 안의 잔상은 첨단의 속도로 멀어지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몇 주 전 아버지의 식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노인처럼 손을 많이 떠셨다. 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탓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대합실에서 그런 모습으로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젊은이처럼 주위는 아랑곳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따가운 시선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삶의 예기치 않은 풍파가 젊은이를 강하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어쩌면 광주도 마찬가지다. 광주는 내게 역사의 도시일 뿐이다. 그 도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내가 아는 것은 박제된 지식일 뿐이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저 마음 깊은 곳에 지식으로도 배우기 힘든 인간애를 갖추지 못하는 한 예고된 죽음 앞에서 총을 드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의 눈총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기차가 수서역에 도착한 시각은 거의 자정이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지하철역이나 택시 승강장으로 사라졌다.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도 도시의 지평선을 가득 채운 노란 불빛은 어떤 날보다도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날 오랫동안 택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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