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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Nov 12. 2019

달의 게임

지고 이기는 게 아니야


   녀석은 이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숨어있던 조그만 행복을
데리고 나온다.



저녁을 먹고 작은 녀석과 산책을 나갔다. 달은 오늘따라 노랗게 익었다. 마치 손으로 누르면 누런 액체라도 쏟아질 것처럼. 까만 밤, 빌딩 숲 위의 달은 자연의 유일한 저항처럼 보인다. 밤하늘에 홀로 남아 인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항하고 있다.

녀석은 무슨 이윤지 시무룩하다. 아마도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보나 마나 친구들과의 문제일 것이다. 나를 닮아 잡기에 소질이 없다. 운동도 그렇고 게임도 영 신통치가 않다. 언젠가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내게 물었다.

“아빠, 매일 지는 걸 재밌게 할 수 있어?”

지금까지 10년 넘게 살아오면서 생긴 가장 심각한 질문 같다. 표정은 어느 철학자보다도 진지하다. 그날 내 마음의 어딘가가 툭 하고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도무지 대답할 게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도 녀석은 그때와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 태오야. 하나만 약속하자. 네가 뭘 잘못하더라도 너 자신을 너무 미워하진...”

녀석이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다. 아빠가 중요한 이야길 한 거 같고 어떤 식으로든 동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었을 것이다.

“아빠, 나 오줌 마려”

아마도 내 지레짐작이었나 보다. 녀석은 단지 생리현상이 불러온 고뇌와 마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나온 빌딩의 불은 꺼져있고 아빠도 좀처럼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품고 걸어온 것이다. 과연 나의 말은 과녁을 한참이나 빗나간 게 되어버렸다. 아빠의 말이 들리기나 했을까.

조금 걷다 보니 어두컴컴한 빌딩 1층에 경비실이 보이고 얼핏 사람의 실루엣도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복도 양편으로 남녀의 픽토그램도 보인다. 우리가 찾는 게 마침 그곳에 있다.

문을 당겨보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내 검은 실루엣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손사래를 치는 건 줄 알았는데 오른쪽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그곳에 열린 문이 보였다. 불도 없는 곳에서 검은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다.

“무슨 일이요?”라고 구세주는 조금은 퉁명스럽게 묻는다. 그는 마음속에서 구세주의 지위를 이내 상실하고 만다.

“화장실 좀 갈 수 있을까요. 아이가 좀 급해서요.. “

어둠 속에서 나는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예의범절의 표본처럼.
구세주였던 실루엣은, 아니 실루엣이었던 구세주는 탐탁지 않게 우리를 빌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녀석은 이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숨어있던 조그만 행복을 데리고 나온다.

“감사합니다”라고 나는 어둠 속에 불이라도 켜질 것 같은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소리를 들은 실루엣의 검은색은 농도가 조금 옅어진 것 같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 잘 됐구나, 같은 말이 나오려면 몇 단계의 명도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아이도 꾸뻑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다시 보니 실루엣은 귀찮아하는 블랙으로 짙어져 있다.

달은 여전히 샛노란 색이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의 모든 블랙과 홀로 싸우고 있다.

“ 지는 게임이 재밌지 않다면 아빠하고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달은 지고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녀석은 물끄러미 아빠를 바라본다. 생리현상의 고뇌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저 졸린 기색이 역력한 아이의 눈망울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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